내면의 힘은 혼자서 창조할 수 없다
몇 년 전, 직장 동료였던 소현이는 회사를 그만두고, 제주도로 여행을 가더니, 한 게스트하우스(이하 게하) 매니저가 되어 아예 그곳에 눌러앉아 버렸다.
게하 창밖으로 푸른 바다가 보이고, 마당에는 알록달록 해먹이, 누워보라고 유혹하고 있으며, 금빛 리트리버가 꼬리 치며 뛰놀고 있는 사진을 자주 보내왔다. 몇 번째 보내오는지 나도 사직서 내고 바로 떠나고 싶게 만들었다. 그래서 소현이와 친했던 나의 여자 친구와 주말에 잠시 제주도에 다녀오기로 했다.
마침 제주도에 있는 렌터카 회사에서 이벤트를 하고 있었는데 2만 원만 내면, 랜덤으로 차종이 결정되어 48시간을 사용할 수 있는 이벤트였다. 랜덤박스에는 고급 외제차도 들어 있고, 모닝 같은 소형차도 포함되어 있었다.
주말이 되어 우리는 청주공항에서 제주도로 날아갔다. 렌터카 회사에 도착해서 드디어 랜덤박스를 열었는데 렌터카 직원이 웃으면서 말했다.
"축하드려요! 그랜드 스타렉스에 당첨되셨어요."(스타렉스는 봉고차처럼 생겼다.)
스타렉스라니.
사실, 나는 뚜껑이 열리는 외제차가 나오길 바랐다. 한 번도 안 타보기도 했고, 제주도에서 외제차를 타면 제주도의 풍경이 더 여유롭게 느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여자 친구의 반응이었다. 눈치를 살피려고 고개를 돌렸는데 그녀는 배꼽이 빠져라 킥킥대며 숨넘어갈 듯 웃고 있었다. 나도 덩달아 웃기 시작했는데 그녀가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는 약간의 안도와 함께 예상치 못한 봉고차처럼 생긴 스타렉스라는 자동차를 타고 젊은 커플 둘이 제주도를 누빌 상상을 하니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광경이고, 재밌는 추억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11인승 스타렉스를 인계받아 차에 올랐다. 나는 군 생활을 하면서 버스로 운전을 배우고 대형면허를 따고, 기동대 버스를 운전했었기 때문에 사실 백미러가 큰 스타렉스가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에어컨이 아주 빵빵해서 느낌이 좋았다.
우선 이곳 제주도까지 오게 만든 게하 매니저 소현이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내비게이션을 찍고, 한참을 달리고 있는데 내비게이션에서 좌회전을 하라는 표시가 나왔다. 좌회전을 하면 큰 길이 나오는데 그 길을 따라 5분만 가면 목적지다. 그런데, 왠지 우회전이 하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는 그 느낌을 정당화하듯이 생각들이 논리를 펼치기 시작했다.
"일하는 것도 아니고, 이럴 때 마음 끌리는 대로 해보는 거지! 이런 게 여행의 묘미 아닌가?"
나는 우회전을 했다.
여자 친구도 내 생각에 동의해 주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서 익숙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금빛 리트리버와 함께 산책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설마 소현인가?> 했더니 정말 소현이었다.
우리 셋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는데 소현이에게 몇 시에 간다는 말도 한 적이 없었고,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반대방향으로 운전대를 꺾었으며, 마침 그 시간에 소현이는 리트리버를 산책시키러 잘 가지 않는 그곳에 나와 있었다. 하지만 소현이는 우리 커플이 스타렉스를 타고 나타났다는 게 더 놀라웠다고 한다.
우연이다. 우연일까?
만약 소현이가 리트리버와 산책을 하지 않았다면 우연이라고 생각할 일은 없었다. 만약 내비게이션이 가라는 대로 갔다면, 우리가 타고 온 비행기가 그 시간이 아니었다면, 아니 제주도를 오기로 하지 않았다면, 소현이나 내가 그 회사를 다니지 않았다면, 그날의 우연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우연만 그런 것이 아니다. 별생각 없이 지나가는 한 순간 한 순간들은 과거의 여러 복합적인 일들이 조합되어 지금의 이 순간을 창조해 내고 있다. 우연은 조금 더 강한 인상이 남을 뿐이다. 우리는 이 순간이 창조되어지는 것을 목격하는 자다. 그리고 원인과 결과라는 논리적 생각으로 해석한다. 그리고는 그 해석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법칙을 찾아내고, 이 순간을 창조해 내는 힘을 소유하려 한다.
행복해지는 힘,
부자가 되는 힘,
명예와 권력을 가지는 힘,
그 힘을 얻을 수 있는 법칙을 찾아 헤맨다.
그 힘을 얻기만 하면 이 순간을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창조자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창조는 전에 없던 것을 처음으로 만드는 일인데 그러한 힘은 전에 없던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내재되어 있던 것을 발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라리 탐험가라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우리는 탐험가다.
우리 안에 숨어 있던 힘들을 발견하기 위해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고, 여행을 떠나며, 삶을 경험하는 것이다. 하지만 발견한 다음이 더 중요하다. 내면의 힘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활용하는 방법을 모른다면 벽장 가득 뜯지 않고 진열해둔 술병들과 같다.
그렇다면 내면의 힘은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가.
내가 지켜본 바로는 내면의 힘은 혼자 힘으로 현실화시킬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힘이 발현될 수 있는 어떤 상태를 준비시킬 수 있을 뿐이다. 충분한 준비가 끝나면, 그 힘은 마치 우연을 가장하여, 또는 일상에 숨어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러한 사실을 모른다면,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착각하여 처음엔 자신감을 가지고 시작하지만 결국엔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포기해버리고 마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한 우물만 파라,
쥐구멍도 볕 들 날이 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이 말이 전부 맞는 말 같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이유는 전부 나 혼자서 할 수 있다는 착각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을 할 수 있는 준비상태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준비상태를 항상 새롭게 유지하는 것이다. 그때, 내가 닦아놓은 그 길로 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내면의 힘은 스스로 모습을 나타낸다.
우리는 그 힘을 이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어쩌면 그 힘을 받아들일 준비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만큼 가까이에 있었고, 너무 쉽게 일이 풀리기 때문이다.
실패를 거듭하다가 포기했던 일이 있다면 이번엔 이렇게 해보자.
"그것의 성공은 내가 하는 게 아니다.
나는 그 성공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이다.
준비가 다 됐다는 판단은 내가 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모를 뿐, 내맡기고, 믿고,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