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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도제작소 Sep 01. 2021

흑백의 명암으로 그려진 두 갈래 길(道)이 만나는 곳

이준익 감독의 <자산어보>

1800년 영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한다. 나이 어린 왕을 대신해 정순왕후 김씨는 수렴청정에 나서고, 정조 재위 시기 성장한 남인 시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노론 벽파는 명분을 구축한다. 순조 즉위 1년인 1801년 “인륜을 무너뜨리는 사학(邪學)을 믿는 자들”이라는 하교를 통해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하는 ‘신유박해’가 일어난다.


성리학의 해석과 실천에 있어서 이견을 달리하며 펼쳐졌던 조선시대 당쟁사에서 조선 건국의 근본 이념이었던 성리학이 아닌 다른 이념이 당쟁사에 등장한 것이다. 서양의 학문으로 유입되었던 서학(西學)은 자발적인 천주교 신자를 양산하게 되면서 인륜을 위협하고 무너뜨리는 자들이 믿는 사학(邪學)으로 낙인 찍히며 정쟁세력을 제거하는 명분이 된다.

“금수와도 같은 자들이니 마음을 돌이켜 개학하게 하고, 그래도 개전하지 않으면 처벌하라”는 정순왕후의 하교에 따라 배교(背<6559>·믿었던 종교를 배신하는 행위)를 약속하고 정약전은 전라도 신지도로,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현으로 사형을 면하고 유배의 길에 오른다. 같은 해 정약전의 조카 사위였던 황사영의 백서 사건으로 한양으로 압송되어 다시 죄의 경중(?)에 따라 형제지간인 정약전과 정약용은 각각 천혜의 고도 흑산도와 땅끝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는 것으로 이준익 감독의 영화 ‘자산어보’는 시작된다.


“이 영화는 정약전이 쓴 ‘자산어보’의 서문을 바탕으로 만든 창작물입니다”라는 자막이 영화 첫 장면에 나온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중심인물인 정약전과 장창대의 인연을 ‘자산어보’ 서문에 근거했다는 것이다. 분명한 역사적 사실의 뼈대를 기반으로 감독의 생각을 녹여내며 영화를 만들어간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에 상상력을 동원해 이야기를 만들고, 자잘한 사건들을 동원하며 행간을 채운다. 그 중심엔 “벗을 깊이 알면 내가 더 깊어진다”는 정약전의 대사처럼 ‘자산어보’의 편찬과정에서 함께했던 정약전과 장창대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


정약용이 유배생활 중에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등 수백권의 저서를 남길 동안 정약전은 ‘자산어보’를 포함해 딱 세 권의 책 밖에 남기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정약용의 ‘목민심서’와 정약전의 ‘자산어보’는 창대로 인해 묘한 긴장을 일으킨다.


‘목민심서’는 조선 후기 지배층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담은 책으로 유교적 정치 질서 속에서 청렴과 애민을 통해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을 담고 있다. 흑산도 주변의 해양 생물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자산어보’는 실사구시의 탐구적 서적으로 그 결을 달리하고 있다.


정약전은 서학을 철학적이면서 실사구시의 과학적 영역으로 인식한 반면, 정약용은 성리학을 보완하는 영역으로 수용하고 있다. 미세하지만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정약전이 성리학과 서학의 중간에 위치할 때, 정약용은 성리학을 중심에 두고서 서학을 취한다.

창대는 정약전과 정약용, ‘자산어보’와 ‘목민심서’ 사이를 오간다. 성리학의 질서 속에서 ‘사람 노릇’을 위해 입신을 갈망하던 창대는 정약전의 유배로 자산어보의 길과 목민심서의 길 사이에 놓인다. 스승과의 인연으로 학문은 깊어지고, 흑산도와 강진을 오가며 성리학의 이념을 세상에 구현해 보고자 하는 포부는 무르익는다.


‘자산어보’와 ‘목민심서’ 사이 이상과 현실, 관념과 실사가 충돌한다. 조선시대를 지탱해 왔던 이념이 새로운 시대에 방향을 제시해 주지 못할 때, 다시 성리학으로 들어가 잃어버린 길을 찾는 이와 성리학 바깥에서 또 다른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영화 속에 펼쳐진다.


‘문을 닫고 손님을 사양하며 옛 책을 매우 좋아(‘자산어보’ 서문에서 인용)’했던 실존인물 창대는 감독의 상상력이 더해져 두 갈래의 길(‘자선어보’의 길과 ‘목민심서’의 길) 속으로 던져진다. 흑산도와 강진을 오가던 창대는 마침내 나주로 나가고, 선택했던 길 속에서 다시 흑산도로 돌아 온다.


그래서 이 영화의 주인공은 ‘창대’다. 다산(茶山·정약용의 호)의 길(道)과 손암(巽庵·정약전 호)의 길(道)을 오가는 창대의 여정을 그린, 여백과 흑백의 명암이 수묵화처럼 그려지는 로드무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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