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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ear and dear Apr 08. 2024

예약은 필수, 50분에 9만 원

심리상담

2년간의 사내연애에 종지부를 찍고 우리는 결혼했다.

남편과 8살 차이가 나는 관계로, 장거리 연애가 너무 힘들다는 핑계로 우린 일찌감치 결혼을 약속했다. 

신혼 생활이 너무 달콤해 1년 정도는 아이 계획이 없었고, 3년 정도가 되니 조금 초조해졌다. 

산부인과에 찾아가 검사도 해보고, '

아빠 되기가 두렵다는 남편이랑 그러니 뭐가 되겠냐며 지지고 볶다 4년 차에 드디어 첫 아이가 생겼다. 

지금 생각해 보면 출산 후에 조금 우울했던 것 같은데, 아이가 6개월이 될 때쯤

뜬금없이(?) 둘째가 생겼다. (아가야 뜬금없다고 표현해서 미안해, 분명 이유가 있을 테지) 

'나는 아직 엄마 하는 법을 하나도 모르겠는데 애가 하나 더 생긴다고?'

일단은 모르겠으나 책임감만을 어깨에 이고 지고, 나한테서 버릴 수 있는 것들을 모조리 내려놓아 가며

순도 100% 엄마가 되기 위해 애쓰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둘째가 태어나고, 친정에서 몇 달을 신세 지고 남편이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아직 돌이 되지 않은 둘째는 초저녁에 잠이 들었는데, 보통은 남편 담당이었다. 

남편도 같이 잠들었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보통 동생이 생기면 태어나기 3달 전쯤에 어린이집을 보내는 것이 좋다고 했다.

동생이 생기고 어린이집에 입소하게 되면 엄마랑 헤어지는 것이 더 힘들다는 이유였다.

그때는 코로나가 가장 심하게 유행하던 때였지만, 두 아이에게도 분리될 시간이 필요했다.  

마침 대기 걸어두었던 어린이집에서 연락이 와서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아이를 보냈다. 

30년 넘게 어린이집을 운영하신 원장님도 놀라실 정도로 아이는 몇 달을 헤어지기 힘들어했다. 

몰래 근처에서 눈물을 훔치며 지켜보던 날도 많았고,  

적응 기간인 1달 동안은 겨우 2시간 남짓 아이를 보내놓고 라면을 끓여 먹으며 

내가 고작 이거 먹자고 아이를 그렇게 보낸 건가, 혼자만의 죄책감이 빠졌었다. 



우리가 사는 지역은 둘째 아이부터는 다자녀 혜택이 있어 

아이 돌봄 서비스를  저렴한 비용에 이용할 수 있었다. 

주 3회 아이 돌봄 선생님께 둘째 아이를 맡기고 무조건 집 밖으로 나갔다.

어린이집 근처에 있는 어린이 도서관과 동네 스타벅스가 나의 피난처였다. 



낮잠을 자고 오는 형아는 대부분 12시가 다 돼서야 잠이 들었고,

30년이 다 돼 가는 우리 아파트는 층간소음에 아주 취약했다.

아래층 아주머니는 본인도 초등학생 아이들이 있으면서 밤 8시가 되면 문자가 왔다. 

집안 전체를 두툼한 유아 놀이 매트를 깔았고, 두께 때문에 방문이 이 열리지 않아 

문 여닫는 부분만 비워두었는데 아이가 거기만 걸어가면 연락이 왔다.  

아직 두 돌인 아이를 12시까지 조용히 잡아 두는 것은 내 몫이었다. 



그렇게 모두가 잠든 뒤 6인용 식기세척기에 젖병과 조그마한 식기들을 넣고

집안일과 설거지를 마무리하고 창 밖에 달을 바라보던 날들이 있었다.

매일 그렇게 숨을 고르다 새벽 3시쯤이 돼야 잠이 들곤 했는데, 

무엇이 힘이 드는지 우울한지, 자각도 되지 않고 그냥 아이들을 봐서라도 살고 싶었다.  

정신과에 찾아가긴 두려워 지역에서 가장 큰 상담센터에 찾아갔다. 

그렇게 맺은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힘든 일이 있을 때 생각나는 사람이 상담 선생님이라니,

어느 답답한 질문에도 적절한 조언을 해줄 어른이 계시다는 건 

삶에 있어 정말 다행이고 축복이란 생각을 하곤 한다.

다만 그녀를 만나려면 미리 예약을 해야 하고, 50분에 9만 원을 지불해야만 한다. 

조금 웃프지만 난 9만 원을 지불함으로써 타당성을 가지고 입에 모터를 단 듯

와다다다 쏟아낼 수 있다. 

이제 내 인생에 멘토, 족집게 선생님, 피난처 등으로 생각하는 정도의 관계가 되었다. 



아버지 얘기를 하면 선생님 눈에는 자주 눈물이 차오른다.

그러면 나는 일부러 다른 곳을 바라보며 얘기한다. 

초기 상담 때 기질검사와 문장완성검사 등을 했는데, 

선생님께서 먼저 본인은 나와 비슷하다고 하셨다. 정말 그랬다.

상담사는 내담자의 감정에 함께 동요하면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선생님은 유난히도 아버지 얘기에 취약하시고, 나는 그게 나쁘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진심으로 들어주시는구나, 싶어서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갑상선 암 수술을 하고 찾아갔을 땐 

사실 본인도 그동안 항암을 하느라 머리카락이 빠져 가발을 쓰고 있었노라고, 

이번에도 또 얼마나 속으로 누르고 참아 몸이 아플 때까지 견딘 거냐고 야단을 치셨다. 

언제든 암은 다시 재발할 수 있는 병이니 죽고 싶지 않으면(?) 그러지 말라 신다. 

가족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지만, 든든한 내 편이 생긴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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