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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그미 Aug 15. 2022

나의 자궁과 노동과 행정 이야기

나의 노동 속 경력단절의 그늘

공무원이 되면서 나의 경력단절은 1막을 내린 것 같다. 일단은 그렇다. 나는 앞으로 30년 동안 가장 고용경직성이 강한 직장에서 월급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2천만원 조금 넘는 연봉 주제에 전세대출을 받을 수 있는 신용을 얻게 해 준다. 정부가 보증하는 월급쟁이라니, 그리고 그것으로 가능한 신용이라니 천군만마를 얻은 것만 같다. 이렇게 살 만한 개구리가 된 나는 내 올챙이 시절을 잊을 수 없어, 경력단절여성 업무를 할 때마다 내 업무의 정책대상이 모두 다 내 이야기인 것만 같아 가슴이 아프다.

경력단절여성의 일이 내게서 멀지 않은 것은 그것이 내 인생에 가장 큰 고뇌 중 하나인 직업 문제와 늘 달라붙어있었기 때문이다.

20대 후반에 겨우 일을 시작한 나의 첫번째 직업은 학원강사였다. 첫 학원에서 다음 학원을 찾아 이력서를 여기저기 넣었다. 그 중 한 곳에서 전화를 받았다. 그 원장님은 대뜸 날더러 '결혼할거예요?'라고 물었다. 난 누군가와 분명히 결혼할 작정이 있었으므로 그렇다고 대답했고, '언제 할 거예요?'라는 후속질문을 들었다. 2년 내에 결혼할 사람이라면 면접도 보고 싶지 않다고 하더라. 그 외에 내 역량에 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무 것도, 말이다. 그 통화의 싱거움과, 굳이 내 전화번호 11자리를 눌러 그 싱거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전화를 건 수고 사이에 내 이력서에 대한 그의 가치판단이 있었을 것이다. 내 이력서가 딱 그만큼이었을 것이다. 아, 그렇겠다. 이력서를 더 열심히 써야지. 더 나의 노동자성을 치장해야지. 입소문을 타는 강사가 되어야겠다, 이왕이면 당장 내일 결혼해야 해서 중간고사 특강은 어려울 것 같다고 말씀드리더라도 원장님이 꼼짝 못하고 휴가를 보내주실 만한 탑급 강사가 되어야겠군. 그래, 학원강사가 몇 만 명이든 그 중에 송곳처럼 빼어난 단 한 사람이 되어 다른 강사들이 이직하지 못할까 봐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결혼 같은 것도 감히 해보는 거야!

나는 학원강사로 이직하기를 단념하고 영상회사에 입사했다. 구성작가로서 초보치고는 나쁘지 않은 편으로 일했다. 큰 회사는 아니었어도 다들 직업인으로 예의를 갖추고 지냈고 많이 받지는 못했지만 일한 만큼은 받았던 거 같다. 그리고 이 일을 하면서 세상물정을 조금씩 배우기 시작했다. 재미있었다. 그러나 결혼 즈음에 '계약 기간 만료'로 회사를 떠났다. 이 퇴사는 정말 미묘하게 이루어졌다.

나는 무엇을 탓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내 직속 상사는 내 결혼소식을 처음으로 아셨고 진심으로 축하해주셨다. 그러나 그 다음주에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을 거냐고. 나는 그렇다고 답했고, 아이를 낳고도 회사에 다닐 거냐고 묻는 말에도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들었다. 아내의 임신과 회사생활을 지켜보니 임신하고 일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고, 출산까지 잘 넘어가고 나서도 아기 기르는 일은 다를 것이라고. 그리고 그의 경험에서 많은 여자 동료들이 다시 일하러 온다고 하다가 아이를 낳은 후 말을 바꾸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잘 생각해보라고. 그 즈음 다른 팀 직원이 임신 초기 증상으로 인해 일하기를 몹시 힘들어하다 퇴사를 선언했다. 나는 상사의 이야기를 정말 열심히 곱씹어보았다. 그가 아내의 임신을 지켜보며 든 생각은 진심인 것 같다. 그러나 아이를 낳고 일터를 떠나는 여자들에 대한 기억도 사실인 것 같다. 그 경험을 토대로 나에게 퇴사가 나을 것 같다고 말씀하시는 걸까? 그렇다면 나는 미래의 나를 어떻게 담보하고 그를 설득할 것인가? 내 퇴사는 내가 결정했다. 그리고 대표님과 상사 모두 조금 서운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도 못지 않게 서운했다. 이 결정에 내가 오로지 내 생각만을 반영한 거였을까?

상처를 남긴 이 퇴사 후 나는 우울했다. 퇴사 즈음 공무원 시험을 보기로 마음먹기는 했지만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마음이 그렇게 산뜻한 것도 아니었다. 결혼이나 아이에 관계없이, 아주 오랫동안 나는 내 직업을 두고 고민했다. 이런저런 직업정보를 찾으며 이래라저래라 하는 글을 읽었지만 '이거일까?'싶은 건 있어도 '이거 말고는 없다'싶은 것도 없었다. 나는 그냥 얼음틀에 담으면 얼음이 되고 잔에 담으면 잔에 담기는 물 같았다. '즐거운 일을 하며 돈을 번다'는 말은 근로의 대가를 경제적 가치와 정신적 가치 양면으로 돌려받으며 삶의 보람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속이는 환상일 뿐이라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걸 좇은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남편은 나에게 앞으로 30년을 하게 될 일을 찾으라고 조언했다. 나는 그런 일을 찾는 대신 30년을 일할 수 있는 직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3년을 시험장에 출입한 끝에 얻은 쾌거였다.

국가가 30년간 고용을 보장한 이 직장에서, 이제 내게 결혼하면 퇴사할 거냐고 묻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미 결혼했다. 임신할 거냐고, 임신하면 일은 어쩔 거냐고 묻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 질문이 없는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공무원이 된 것이 아닌가. 그리고 공무원으로 임용되던 당시 나는 이미 임신중이었다. 나는 임용의 문턱에서 또 고민에 빠졌다. 임용유예를 할 것인가, 그대로 임용받은 후 3개월 만에 출산할 것인가? 그리고,

육아휴직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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