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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교진 Mar 05. 2017

그냥은 못 넘어갑니다.

[열일곱번 째 책] 마리아스토이안의 ‘그냥 좋게 받아들이세요“

내가 지하철을 탄 건 오후 2시쯤이었다. 그때 치마 밑으로 손 하나가 미끄러져 들어오는 느낌이 왔다. 서로 밀리고 밀치는 만원 지하철 안에서 나는 그 손이 우연한 접촉이려니 하고 넘겼다. 그런데 지하철이 출발하자마자 네 개도 넘는 손들이 다시 치마 속으로 들어왔다.   


분홍 배경에 남색으로 그려진 일러스트가 예쁜 책이다. 예쁜 이미지에 끌려 가볍게 집어 들어 펼쳤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내려놓는 마음이 무겁다. 예쁜 책 표지가 잠시나마 가리고 있었던 책 안의 이야기가 너무도 일상적이고, 빈번하고, 반복적이어서 섬뜩하기 때문이다.        


마리아 스토이안의 <그냥 좋게 받아들이세요>는 실제 성희롱과 성폭력 피해 경험을 만화로 그린 책이다. 총 20개의 실화를 그리고 있다. 그런데 이 실화들을 채 모두 보기도 전에, 이야기들의 구체적인 상황과 가해자, 피해자는 모두 다름에도 이들 사이에 반복되는 패턴이 있음을 알아챌 수 있다. 섬뜩함은 여기서부터 나온다. 이 패턴이 지극히 일상적이고, ‘보통’을 가장하고 있어서 나라고 피할 방도가 없는데, 피하지 못했음을 피해자의 탓으로 돌리는 무신경과 억압이 섬뜩하고 무섭다.      


그렇지만 책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더 이어진다. <그냥 좋게 받아들이세요>는 책 말미에 성폭력의 피해자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고, 어떻게 도움을 줘야하는지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 일상적인 성폭력 문제의 원인이 ‘당신’에게 있지 않으므로 침묵을 깨고 나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뤄야 함을 말하고 있다. 20가지 실화에서 느낀 섬뜩함의 웅크림을 저자는 아마 예상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들의 폭로가 일종의 치유 과정이 되길 바랐다.


말이 가진 힘이 있다. 입 밖으로 자신의 다짐, 의지, 꿈을 내뱉는 순간, 그 말에 담긴 소망이나 기대감 같은 것들이 실제 실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더 올라가는 것. 이것이 우리 각자의 찬란한 삶을 위해 기대고 있는 ‘말의 힘’이다.     


말의 힘이라는 건 꽤 강력해서 개인적으로 외에도 사회적으로도 유용하게 작용한다. 다짐을 위한 혼잣말을 넘어, 사회를 향해 ‘말’을 하기 시작한 순간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누군가 일단 말을 하면 어쩔 수 없이 들리고, 듣게 되고, 들으면 그걸 생각하게 되고, 생각하면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고, 발견하면 해결을 고민하게 되는 이 흐름들을 거치면서 말이다.     


마리아 스토이안의 <그냥 좋게 받아들이세요>를 통해 말이 시작됐다. 성폭력의 잘못을 피해자들에게 돌리는 편견과 억압 때문에 입을 닫아왔던 피해자들이 서로의 피해 경험을 이야기했다. 답답함과 분노를 느끼는 것을 시작으로 생각이 시작됐다. 그리고 생각의 시작은 성폭력에서 피해자들을 더 고통스럽게 가해자 중심적인 사고 그리고 전체 성폭력 피해자 중 압도적인 여성 비율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지, 이 일을 어떻게 개선해 나가야 할지의 물음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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