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교진 Jun 21. 2017

'계발' 말고 '개발'하자고요.

[스물한 번째 책] 임성순의 장편소설 '자기개발의 정석'

이 부장이 처음 오르가슴을 느낀 것은 그의 나이 마흔여섯 때였다. 그 순간에 대해 누군가 묻는다면 그는 아마 이렇게 답할 것이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불이 켜진 것 같았어."


주인공 이 부장은 그의 '이'씨 성만큼이나 흔한 사람이다. 지극히 성실하고 대체로 무난하다. 착실하게 취업 준비를 해서 대기업에 입사했고, 주말없이 출근하며 회사에 목을 매 대기업 부장까지 달았다. 지금은 아내와 딸을 캐나다에 보내 놓고 매달 돈을 보내는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고 있다. 이 부장은 아무 생각 없이 그 나이, 그 지위에 주어지는 의무만을 다하며 살아왔다. 그의 말마따나 '생각없이' 말이다.


그러다 원인 미상의 전립선염에 걸려 이 부장은 병원으로 치료를 받으러 간다. 의사에게 전립선염 마사지를 받던 중, 이 부장은 그동안 느껴보지 못한 쾌감을 느끼게 되고 이것이 드라이 오르가슴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동안 쾌락과 오르가슴에 대해 알만큼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 부장 자신이 알던 것과는 다른 새로운, 진정한 세계가 열린 것이다.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 사람답게 이 부장은 새로운 관점으로 사람들을 보기 시작한다.


이마에 핏발을 세우고 자신에게 분노를 쏟아 내는 상사를 보고, 운전 중 끼어드는 사람, 경적을 울려 대는 사람을 보고 '아, 욕구불만이야. 불쌍하네.'(p66) 하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기력하고, 예민했던 이 부장의 일상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마흔 여섯, 그것이 비록 오르가슴이라 할 지라도 전에는 몰랐던 스스로 기뻐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몰랐던 나를 '개발'했다.


책 중간중간에 "자신의 삶을 주도하라", "끝을 생각하며 시작하라", "소중한 것을 먼저하라" 등의 메시지가 등장한다. 책을 읽은 사람은 알겠지만 이 메시지들은 모두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에서 말하는 바로 그 습관들이다. 사회가 바람직하다고 권장하는 것들을 '자기 계발'하기를 권고하는 사회 분위기. 그리고 이를 반영하는 대표적인 책에 쓰인 메시지 아래,  내가 몰랐던 또 다른 나의 모습을 '개발'한 이 부장의 모습은 아이러니하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정체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사회 일원으로서의 정체성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이다. 우리는 전자로서 수행해야 하는 역할을 꽤 성실하고 철저하게 수행해낸다. 한 사회를 이루는 일원으로서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역할(학생으로서, 군인으로서, 아버지로서), 책임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로서의 정체성은 후순위로 밀리거나 쉽게 무시받는다.


40대 남성이라면 이룰 수 있는 것들을 대개 이뤄놓고도 처음으로 인생에 불이 켜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이 부장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자신의 진짜 모습은 잃어버린 채 생각없이 주어진 의무만을 수행하는 것, 결국엔 그것이 편하다고 생각해버리는 것. 아마 작가는 이것의 모순과 억압을 위와 같은 아이러니를 통해 이야기하려는 했던 게 아닐까.


이 정도까지 이 책을 해석하고 보니 문득 깨달아 지는 게 있다. 자기계발의 모순을 지적하는 작가의 메시지 앞에 이렇게 구구절절 책을 해석하는 게 이 책을 옳게 읽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 내가 진짜 자기계발에 억압되어 있다는 생각 말이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여러분만은 그냥 오르가슴이라는 설정에 피식거리며 이 책을 온전히 즐기시길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삼가 읽어다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