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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교진 Nov 28. 2018

죽고 싶지만 책을 읽고 싶다면

[서른두 번째 책] 한병철의 ‘피로사회’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가 잘 팔리는 것을 보면, 또 출판사에 책 속 정신과 의사에 대해 묻는 독자 문의가 많이 들어온다는 걸 귀동냥으로 듣다 보면, 애늙은이 같지만 세상이 참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든다. 드라마 속 주인공의 비밀스러운 사정, 독특한 설정 정도로만 취급됐던 것이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을 보면 말이다. 포기한다, 체념한다, 그만 한다 등의 말도 마찬가지다. 긍정이 뿜뿜하는 사회에서 금기시 되어 온 이런 말들이 이제 거리낌 없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유머로 소화되고, 이러한 경험을 담은 책이 성공 신화를 말하는 자기계발서에 뒤지지 않게 더 잘 팔리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할 수 없는 것도 힘이 든다. 그러니까 뭔가를 포기하고 단념하고, 체념하는 것도 엄청난 용기와 결단 요구하는 성공만큼이나 적극적인 행동이어서 에너지를 요한다. 그런데 이러한 메시지들이 사회에 전파된 게 얼마 되지 않았고, 최근에는 이러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나는 아마 이러한 책들의 철학적 바탕, 기반이 한병철의 ‘피로 사회’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반 박자 늦었지만 서평을 써본다. 기현상의 이론적 정착을 위해서? 사는 게 피곤해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를 집어 드는 독자를 위해?




  지난 세기는 면역학적 세기였다. 면역은 나와 다르거나 친숙하지 않은 외부인자에 대해 방어하는 현상이다. 면역학적 세기라고 하면 안과 밖을 경계로 나와 너를 뚜렷하게 구분하여 공격과 방어를 주요 행동 양식으로 삼았던 세기를 의미한다. 그러나 21세기는 더 이상 면역학적 세기가 아니다. 면역학적 반응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제는 안과 밖, 나와 너의 경계는 흐려지고 더 이상 나와는 다른 것에 ‘거부’하는 면역학적 반응은 일어나지 않고 이국적인 것이라고 인식하며 긍정하는 반응이 일어난다. 이질성과 부정성이 사라진, 긍정성이 과잉된 사회인 것이다. 패러다임이 전환됐다. 왜 전환됐을까?


  사회의 무의식 속에는 생산을 최대로 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그런데 이 욕망을 충족하는 데에 있어서 기술적 한계도 있고, 규율과 명령이 생산성 향상에 더 이상 기여하지 않는 임계치도 있다. 여기에 도달하면서 패러다임을 전환된 것이다. 할 수 없다, 해서는 안 된다는 규율과 명령에 단련된 상태는 생산성을 끌어 올리는 데에 제 역할과 소명을 다 했으니 이제 이를 해체한다. 그리고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데, 그것은 명령의 내재화다. 할 수 있는 것 없는 것 구분 없이 무조건 할 수 있다는 긍정의 메시지를 내면에서 스스로 외치도록 내재화하는 것이다. 더 이상 규율과 명령이 없음에도 사람들은 자기 주도적으로 생산성을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해 스스로를 혹사 시키는 이유다.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한 자기 착취의 굴레는 이렇게 돌아간다.


인간이 우울한 건 명령과 금지가 자기 책임과 자기 주도로 바뀌어서가 아닌, 할 수 있다라는 새로운 성과주의적 명령 때문이다.


  규율과 명령으로 움직이던 사회에서는 바깥에서 ‘~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외쳐댔다면, 이제는 ‘할 수 있다’라는 새로운 명령이 내 안에서 울리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아 더 치명적이다. 개인은 각각을 경영하는 기업가가 되어 ‘나’라는 사람을 경영하는 기업가로서 생산성을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해 쉬지도 않고 움직이고 일하고, 활동한다. 새로운 자극에 저항하지 못 하고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지칠 줄 모르고 계속 도전하는 삶은 최고의 미덕이 되었고, 지각은 파편화되었으며 멀티태스킹은 최고의 능력으로 찬사 받고 있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만 있고, 할 수 없는 힘은 없는 치명적 활동 과잉 속, 사람들은 극도의 피로 상태다. 현대 사회에서 우울증, 소진증후군,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등과 같은 정신 질환이 유행하는 건 이 때문이다. 긍정의 폭력적인 모습이다. 뭐든 되기 어려운 사회에서 뭐든 하라고, 할 수 있다고 외치는 과잉 긍정은 우리를 병들게 한다.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는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이러한 피로 상태는 나뿐만이 아니라 공동체에도 치명적이다. 피로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번 아웃이 된 상태로 오직 나만 생각하도록 만든다. 좋은 삶이란 공동의 삶까지 포괄하는 개념임에도 우리는 좋은 삶에 대해서라면 자신의 생존 자체에 대해만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공동체는 이렇게 파괴된다. 또한 할 수 있다는 명령으로 긍정을 과잉하면 반대로 부정이 약화되는데, 이는 부정에 바탕을 둔 감정의 약화로 이어진다. 대표적인 감정이 분노다. 분노는 잠깐 멈춰 서서 상황 전체를 들여다보며 의문을 제기해서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웬만해서 멈춰 서지 않는 현대인들은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점점 더 늘어갈 뿐이다.


  한병철은 여기에서 벗어나려면 ‘할 수 있는 힘’이 아닌 ‘할 수 없는 힘’을 길러야 한다고 본다. 앞으로 나아가는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잠깐 멈춰 서서 돌이켜 보는 생각을 하라는 것이다. 그러자면 사색이 필요하고 사색을 하자면 보는 것,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랬을 때 피로라는 것도 다른 측면에서 발현될 수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번 아웃  상태가 아닌 태평함, 태평한 무위의 능력을 부여하고, 무장을 해제하는 피로로 말이다. 길고 느린 시선 속에서 단호함은 태평함에 자리를 내주고, 무차별성과 우애의 시간을 갖게 해 타자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새로운 영감을 얻기도 하는 가능성을 포함하는 피로로 말이다. ‘피로 사회’는 사회의 진단이자 나아가야 할 방향 그 자체였다.


  한병철이 말한 ‘할 수 없는 힘’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들을 사람들이 고르면서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과정을 한번쯤은 거친다고 생각한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일지, 나를 위해 무엇을 그만 두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 물음에 대해 사람들과 모여 얼굴을 보며 대화하고 지적유희를 즐기기도 한다. 나는 이것이 작가가 말한 ‘벗어나는 힘’에 대해 사람들이 스스로 깨닫고 함께 그 힘을 기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작가가 필요하다고 말한 바로 그 말하기와 생각하기를 스스로 배우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한병철의 피로 사회는 출간된지 오래됐지만 현재까지도 꿰뚫고 있는 인문 서적의 새로운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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