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우식 Aug 12. 2016

행복에 대해서

'행복'이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는 개인마다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행복에 대한 정의가 무엇이든지 간에 자신에게 다가온 행복을 마다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행복한 삶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누구나 원하는 삶의 표준으로 작용해왔다.

 그런데 요즈음의 한국 사회를 살펴보면, 다들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는 듯 하다. 부정적인 뉴스로 아침을 맞이하고, 일터 혹은 학교라는 삶의 공간에서도 끊임없이 힘들다는 한숨소리가 전해지고, sns와 온라인 공간에서도 여성 대 남성, 진보 대 보수, 신세대 대 기성세대 등으로 끊임없이 다투는 현실 속에서, 개인이 향유하는 행복의 양은 충분하지 않아보인다. '헬조선'이라는 말이 곳곳에서 등장하는 유행어가 된 것만 보더라도, 우리는 불행 속에서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혹자는, 굶고 있는 아프리카 어린이, 혹은 돈이 없어 기본적인 치료도 받지 못하는 사람과 우리를 비교하면서, 우리는 행복 속에 살고있지만 배가 불러 이를 자각하지 못한다고 한다. 물론, 상기한 사람들이 우리보다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과연 우리보다 불행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우리가 행복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가를 물으면, 나는 아니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단순히 먹고 사는 것과 그것을 넘어선 몇몇 문화활동을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은 행복의 정의가 되기에 한없이 부족해 보인다.

 위의 주장과 다른 주장으로, 사회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함으로써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견해가 있다. 사회가 요구하는 성공의 길이 아니라 자신만의 길을 추구하라는 말들은 특히 최근에 많이 보인다. 경쟁하는 사회 분위기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낭만을 걷는 삶은 참으로 아름답고 행복해 보인다. 나 역시도 한때 행복한 삶을 이런 식으로 정의하고 살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장기적이고 본질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현대의 메킨타이어까지, 수많은 학자들이 주장 속에는 인간을 사회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음이 드러나 있다. 내가 아무리 내 인생을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다 할지라도, 결국 수많은 사람이 나의 인생을 실패라고 낙인찍는 사회 속에서 개인이 행복을 누리기는 어렵다. 단순히 자신의 삶 속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행복이라는 감정을 줄 수 있지만, 결국 사회라는 거대한 집단이 주는 압박 속에서 개인은 힘없이 경쟁 속으로 복귀하거나, 혹은 이를 견디더라도 끊임없는 불안으로 자신을 혹사시킬 수 밖에 없다. 위 두 사례에 해당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결국 자신의 삶 속에서 행복을 찾는 일은 사회적, 현실적 제약에 가로막힐 확률이 크다.

 그렇다 해서, 내가 어떠한 방식으로도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없으니 삶을 포기하는 것이 가장 괜찮은 방법이라는 허무주의적 해결책을 내는 것도 아니다. 본질적으로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기본 조건은, 사회구조의 변화이다. 그 동안 불행의 원인은 사회가 아닌 개인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노력해라, 열심히 살아라, 불평불만하지 말고 긍정적 사고를 해라, 행복은 주변에 가까이 있음에도 단지 니가 찾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긍정적이고,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나, 올바르지 않은 사회 시스템 속에서 노력만으로 행복을 얻는 것이 가능할까? 나의 노력이 타자가 가진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권력에 의해 좌절되는 시스템 속에서, 개인은 더욱 노력해서 저들을 따라잡아야지 라는 생각보다는 노력해도 안된다 라는 좌절감을 갖기 더 쉬울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행복을 위한 사회 시스템이 무엇일까? 단순히 빵과 술, 미녀와 검투사를 제공하는 로마 제국의 모습이 본질적 행복은 아닐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존한 스미스의 시장자본주의 역시 실업자와 빈부격차라는 문제점을 드러냈다. 모두가 평등한 사회에서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달콤한 맑스의 속삭임 역시, 인간의 이기심이라는 장애물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러한 실패들 속에서, 나는 행복감을 줄 수 있는 사회는 '개인의 노력이 의미를 가지는 사회'임을 발견했다. 개인의 노력이 다른 사람의 선천적 요인들에 의해 가로막혔을 때, 개인은 절망감을 느끼고 노력을 포기하며 이러한 분위기가 사회에 팽배해지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반면, 내가 노력하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나온다는 신념이 사회를 지배할 때, 개인은 희망을 바탕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노력이 의미를 갖는 사회를 위해서 우리는 사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즉, 모든 사람이 정치적 관심을 지닐 필요가 생긴다. 노력이 의미를 갖는 사회를 위해서, 필연적으로 법과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 태어날 때 지니는 격차가 크면 클수록 노력이 지니는 가치가 줄어들기에, 우리는 적절한 재분배를 통하여 빈부 격차를 줄이고, 윤리적 기준을 확립하여 부당한 행위를 하는 사람을 벌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개인이 부당함의 감시자가 되어야 한다. 올바른 사회, 적절한 사회가 되기 위한 시발점은 시민사회의 정치에 대한 관심이다. 한국의 시민사회는 4.19혁명, 6월 항쟁 등을 통해 부당함에 맞서는 힘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그러나, 4.19혁명 이후에도, 6월 항쟁이후에도 시민사회의 정치에 대한 관심은 지속적으로 일정량 이상의 강도를 지니지 못하였고, 이는 사회구조의 결정권이 다시 소수에게 돌아가는 결과로 귀결됐다.

 결국, 사회가 아니라 자신이 속한 작은 공동체에 집중하고 원하는 것을 줄이는 에피쿠로스학파 식의 행복으로는, 완전한 행복에 도달할 수 없다. 개인 개인이 시민사회 속에서 끊임없이 권력자들을 감시, 비판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사회의 공정성이 제고되고 개인의 노력이 성공의 중요 요소로 자리잡는 사회가 구현될 것이고, 이러한 사회 속에서 노력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 행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