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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러뜰 May 04. 2023

광둥어를 시작했다

맞다, 그 "족팡매야~" 엉터리 중국어의 모델

심천 생활 4개월 차, 여기에서만 할 수 있는 새로운 일이 없을까 기웃거리던 참에 광둥어 클래스 광고를 발견했다. 이거다 싶었다. 홍콩 영화 속에서나, 중국언어학 교과서 속에서나 들어봤던 바로 그 광둥어. 푸통화(표준 중국어, Mandarin)만 열심히 배워도 모자랄 판에 실제로 쓸 일도 없는 광둥어(Cantonese)를 뭐 하러 배우나 싶었지만, 벌써 신나 버린 걸 어떡하겠나. 그 자리에서 바로 광둥어 클래스를 등록해 버렸다.


동생에게 얘기했더니 “서울사람이 돈 내고 전문적으로 대구 사투리 배우는 느낌인 건가?”라고 물어봤다. 그 질문에 대답하자면,


글쎄, 서울 사는 중국인이 전문적으로 제주 사투리 배우는 느낌이랄까.


중국의 표준어인 푸통화와 광둥어는 거의 다른 언어라고들 한다. 솔직히 조금은 겁도 났다. 안 그래도 어려울 텐데 중국어로 중국인 친구들이랑 같이 들으면 내가 잘 따라갈 수 있을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첫 수업을 듣던 날, ‘그래도 나 원래 새로운 언어 배울 때 좀 빠르지’라는 자부심은 와장창 무너져버렸다.


병음을 보고 읽는 것조차 혼란스러웠다. 6개의 숫자로 성조가 쓰여있어 한 글자씩 읽는 매 순간이 고비였다. 마치 악보를 처음 읽을 때처럼 더듬더듬 오르락내리락 각 글자의 높이를 맞춰가며 따라가야 했다. 게다가 한자 읽는 방법 정도나 다르겠지, 했던 지레짐작이 너무나 우습게도 기본적인 어휘들의 한자마저 아예 달랐다. 완전히 새로운 어휘들로 문장을 구성해야만 했다. 아주 간단한 문장도 한참을 생각하면서 더듬더듬 뱉어내는 나 자신이 좀 웃기고 애달팠다.


왜 나만 못하는지? 그리고 이 고생을 왜 사서하고 있는 건지?


그 와중에 옆자리 중국인 친구들은 나보다 훨씬 더 빨리 적응해서 제법 그럴싸하게 문장을 읽고 구사했다. 그 모습을 보니 새삼 현타가 왔다. 그저 재미로 가볍게 시작하려 했던 언어가 또다시 스트레스가 되는 순간을, 수업 첫날에 맞닥뜨렸다.


그런데 또 우습게도 집에 오니까 그날 배운 내용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리는 거다. 책을 펴고 단어들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 너, 그부터 시작해서 숫자 읽는 법이며 장소 이름들까지, 아무리 읽어봐도 계속 알쏭달쏭한 그 단어들을 입으로 중얼대면서 써 내려갔다. 아, 뭐야, 재밌네 하면서. 요샌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는 혼자 앉아서 광둥어 공부를 한다. 심천에서 일하는 한국인인 내가, 홍콩 유학생들도 굳이 안 배운다는 광둥어를.


나에게 언어 배우기란 오랜 취미이자, 결국 콤플렉스로 남는 어떤 것이다.


10살에 시작한 영어부터, 전공했지만 여전히 자신 없는 중국어, 중급 정도까지는 배워본 일본어와 스페인어, 맛보기만 한 이태리어와 베트남어 등, 많은 언어를 배워왔다. 하지만 뭐 하나 밥벌이 할 만큼 제대로 하는 게 없다. 외국어로 업무 미팅을 할 때마다 입 다물고 앉아서 잘하는 사람들을 부러워만 하고 있다.


맞다, 실패한 학습자. '몰라서', '못해서'가 죄가 되는 엄중한 사회의 잣대 앞에 먹고살려고 영어와 중국어를 아등바등 공부하는 사람. 언어 공부란 게 어찌 보면 참 비효율적이다. 입문~초급 단계에선 배우는 것 자체가 참 재미있지만 사실 어디에도 쓸모가 없다. 적어도 중급 이상은 해야 어디 가서 약간이라도 써먹을 수가 있게 되는데 그게 또 가성비가 괜찮은 건지 의문인 거다. 게다가 들이는 시간과 노력에 정비례하게 실력이 쭉쭉 늘면 좋으련만, 보통 외국어 학습은 계단식이다. 어디까지 해야 다음 단계로 점프업을 할지 알 수 없다는, 그 점이 사람을 자꾸 지치게 만든다.


그래서 광둥어는 나에게 좀 새롭다.


스펙에 뭐 한 줄 더 남기려고, 잠깐 배워서 학점 한 번 잘 따보려고, 커리어에 작은 도움이나마 보태보려고 배우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중고급까지 배울 생각도 없고, 애초에 고급까지 배워봤자 딱히 써먹을 데도 없다. 나에게 푸통화가 ‘잘해야만 하는’ 무언가라면, 광둥어는 ‘못해도 괜찮은’ 무언가다. 못한다고 스트레스 받을 필요 없이 한 줄 한 줄 입이 열리는 순수한 즐거움만 느끼면 된다.


오히려 광둥어를 시작하면서 작은 용기와 자신감을 얻었다. 내가 생각보다 푸통화를 잘한다는 걸(?) 깨달았고, 작은 일이라도 새로운 도전을 계속하는 내가 좀 사랑스러워 보였다. 속칭 ‘게으른 완벽주의자’인 나는 뭔가를 잘 해내지 못할 것 같으면 아예 시작도 안 해버리는 못된 습성이 있는데, 그냥 질러 버린 뭔가가 꽤나 성공적이었고 생활에 활력까지 가져다주다니. 광둥어 배우길 잘했다. 多谢,广东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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