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느껴보는 감정>
S집에서 와인을 마셨다.
우리 둘의 고등학교 친구인 HW가 두 달 전 아이를 낳았다. 늦은 밤,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고, 아이가 깰까 봐 조심스레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 목소리는 피곤함보다는 은은한 행복이 깃든 소리였다. 전화 화면 너머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 특유의 새침한 표정과 두쪽으로 피어오른 보조개가 떠올랐다.
동시에 마음 한편이 이상하게 흔들렸다. 막연한 감정이었다. 예쁜 아기를 직접 마주할 때도 느끼지 못했던,
이런 기분을 느낄 땐 누군가에게 이야기해 보는 게 좋다. 말하다 보면 실마리가 풀리기도 하니까. 그래서 친구 J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지금 아기 태어난 지 두 달도 안 된 친구랑 통화하고 있는데, 너무 행복해 보여.”
J는 내가 담아 보낸 말속에 있는 모호하고 불분명한 기분을 꿰뚫어 보았다.
“너는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 거야. 내가 믿는 너를 믿어봐. 너 자신을 모르겠으면, 내가 보증해 줄게.”
혼란스러웠다. 아직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소중히 품고, 그것을 아끼는 친구의 모습이 그저 좋아 보였던 건지, 아니면..?
"너 자신을 모르겠으면 내가 보증해 볼게"라는 말은 어쩌면 나보다 나를 더 오래, 자세히 관찰하고, 이해해 준 사람이 주는 믿음의 표현이다. 내가 느낀 혼란스러운 감정이 단순한 부러움일지, 자신이 가진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일지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친구가 먼저 어른이 되어가는 모습과 아이에 대한 생각 등 감정의 복잡성은 쉽게 정리되지 않겠지만, 이 모든 감정 역시 우리가 조금씩 변화해 가는 과정의 일환일 것이다.
♬ Lasse Lindh - I Could Give You Love ♬
<얼떨결에 아픈 부분을 건드린 자여>
대화를 나누던 중 S가 문득 꺼낸 한마디에 오래도록 못 본 척해왔던 내 마음 한편이 내려앉았다. 그 마음은 무겁게 굴러 내려와, 눈덩이처럼 점점 더 커져갔고, 결국 나를 삼킬 만큼 커진 후에야 터졌다.
원의 독백 74페이지에는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주지는 않더라고’라고 적혀 있고, 배우 송혜교 님이 복귀 인터뷰에서 ‘시간이 다 해결해 줄 거야’라고 했던 말을 떠올린다.
어느 쪽이든, 아직 이기적인 나는 여전히 충분한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고 생각하기로 한다. 아직은 나를 위한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말하며, 마음 한 편의 작은 비겁함도 인정하는 편이 차라리 낫다.
갑자기 친구를 울리고 만 S는 미안했는지 무심히 쪽지 한 장을 내밀고, 조용히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 가을 방학 -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 ♬
<오랜만에 만난 인생의 시니어>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는 게 중요해요. 사람들은 흔히 타인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착각하며 살아가곤 하잖아요."
세상에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너무 루틴화된 관계, 똑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면서 세상의 아주 일부분만 경험하며 사는 건지도 모르죠.
그래서, 다채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책을 많이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그렇게 해야 비로소 나만의 관점을 갖고, 내가 가야 할 길을 찾아갈 수 있으니까요.
올해 우리 둘 다 정말 많은 일을 겪었네요.
20대엔 문제가 생기면 곧바로 해결하고자 하죠. 마치 아프면 병원에 가서 치료받듯이, 문제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40대가 되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있다는 걸 점점 이해하게 되고, 그 문제를 없애버리기보다는 함께 살아가며 조화롭게 견디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니 20대엔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 체력을 잘 길러두세요. 40대엔 그 체력을 바탕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와도 조화롭게 살아가는 힘이 필요하니까요.
다음에 만나면, 바로 삼겹살 집에서 소주 한 잔 합시다.
<꽃과 메타인지에 대하여>
연희동의 작은 주택에서 열린 스몰웨딩에 초대받아 다녀왔다. 가을 들어 가장 맑고 푸른 날씨였다. 웨딩에 쓰인 꽃들을 챙겨주셔서 거절할 수가 없어서 얼떨결에 가져왔다. 오랜만에 집에 꽃이 들어와 기분이 묘했다.
살다 보면 문득 내가 설정해 놓은 역할이나 어떤 이미지가 진짜 나를 잠식해 버릴 때가 있다. 마치 내 삶의 연출자도, 배우도 모두 내가 되어, 두 가지 자아가 충돌하는 순간들 말이다.
마치 트루먼쇼의 감독도 나고, 짐 캐리도 나인거지.
트루먼 쇼에서 트루먼이 비현실적인 사건을 경험하면서도 자신의 삶을 의심하기 전까지는 그저 흘려보냈던 것처럼, 나도 가끔은(아니 자주일지도 모르겠다) 감독의 대사에 이끌려 진짜 내 감정을 놓치고 지나간다.
감독인 내가 말한다. "넌 피곤하지 않아." 버티고 버티다 지쳐 누운 후에야 깨닫는다. "아, 나 정말 피곤했구나."
감독인 내가 말한다. "넌 이 일을 잘 해내야만 사랑받을 수 있어." 링거를 맞으며 일하던 내가 번아웃을 맞고, 제주도 한 달 살이를 다녀온 뒤에야 알게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냥 나만으로도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이미 내 곁에 있었구나."
지금까지 감독이 말했다. "꽃은 비싸고 금세 시들어. 사치일 뿐이야." 하지만 막상 웨딩에서 받아온 꽃다발을 보고 나니, 눈앞에 놓인 꽃과 나만이 존재했다. ‘돈에 대한 아까움이나 귀찮음이 여기 어디 있어? 이건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진다. 예쁘다..’
(J의 발가락 따봉이다)
♬ 옥상달빛 - 칵테일 사랑 ♬
<생애 첫 인터뷰, 릴스>
오-피스 인터뷰가 나왔고, 짧은 릴스 영상도 함께 공개되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JW님이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그 장면이 남아있어서 정말 감사하다.
내 휴대폰 바탕화면이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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