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존엄한 죽음을 위한 나의 엔딩노트

by 엄재균

“라면 먹고 싶다”

“김치도 먹고 싶다”

“지금 아무 생각이 없어요”

“그냥 답답하고 안타깝다는 생각밖에는”

“가시가 박혀있는 침대에 누워서 몸을 뒤집는 악몽을 꿔요, 깨고 나면 온몸이 식은땀으로 흥건하고…”


위암 말기 환자가 병실에 앉아 보호자한테 얘기한다. 간경화로 인해 아들로부터 간이식을 받은 후 잘 지내다가 어느 날 위암 말기 판정을 받은 환자다. 진단명을 처음 알았을 때 “마치 총 맞은 기분이었다”라고 한다. 아마 청천벽력 같은 느낌일 게다. 공감은 가지만 내가 직접 겪지 않은 일이라 솔직히 그 공포감은 알 길이 없다. 죽음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누구도 내가 그 당사자가 될 것이라는 진실은 일부러 외면하면서 살아간다. 타인의 장례식에 가서 잠깐이라도 돌이켜 볼 수 있지만 그 기회마저 죽음에 대한 성찰보다 사회적 관계를 위해 방문하기 쉽다.


그 환자는 손주들이 찾아와서 “할아버지 많이 아파?”라는 소리를 듣고는 눈물이 핑 돌았고 손주들을 안고 “할아버지는 너희를 사랑해”라는 말을 하면서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고 했다. 주위에 사람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엉엉 울었다. 그는 “사람이 죽어가는 것도 퀄리티가 있다”라고 말했다. 존엄한 죽음을 얘기한 것이다. “죽어가는 환자도 사회와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일체감을 느낀다.” 그렇게 그는 2개월을 호스피스 병동에서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면서 마지막 가는 시간에 가족들이 함께 하면서 임종을 맞이했다. 호흡은 가팔라지고 섬망 증세가 나타났지만, 마지막 가는 길에 아내와 아들, 딸이 함께 하면서 손을 만져주고 아내는 마지막으로 남편에게 “고마웠다고, 먼저 잘 가라”라고 했다.


EBS에서 방영한 <내 마지막 집은 어디인가>라는 3부작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영상이다. 죽음을 터부시 하는 우리 문화에서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웰다잉’ 문화로 바뀌도록 노력하는 것이 그 목적인 것 같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느닷없이 찾아오지만 누구도 준비를 잘하지 않는다. 자동차를 사려고 할 때도 이것저것 꼼꼼히 따지면서 배우고 익히는데 일생일대의 가장 어려운 일을 맞이하는데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는다. 죽음 역시 준비가 필요하다.


'난 아직 아닌데~?'

'아직 평균 수명에도 못 미치는데?'

'적어도 20~30년은 남았는데~?'라고 생각할 것이다.


죽음은 영상에 나온 환자처럼 아무런 예고도 없이 느닷없이 찾아올 수 있다.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는 생각해도 ‘나는 어떻게 죽고 싶은가?’는 배우지 않고 외면해 버린다. 이 다큐멘터리는 호스피스 병동 5개월의 기록을 담아 '인간다운 죽음'에 관해 묻고 죽음 앞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호스피스 병동이라고 하면 먼저 ‘죽음을 기다리는 장소’라고 생각한다. 물론 말기암, 만성폐쇄성호흡기질환, 만성 간경화 등 죽음을 앞둔 환자를 위한 공간이지만 그곳 역시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다.


호스피스 간호사는 말한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지만 지금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고 그런 사람들을 돌보는 곳이니까, 이곳은 그냥 사는 공간이죠” 맞다. 이곳에도 삶의 의미가 있는 일상이 존재한다. 서로 위로하고 보호받고 사랑하는 그런 기억에 남을 공간이다. 우리나라는 호스피스 병동이 부족하여 대기자가 많아서 들어가고 싶어도 마음대로 입원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캘리그래피, 2025년 1월


우리는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좋은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 우선 심한 고통으로부터 조금이라도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익숙한 환경에서 존엄을 유지한 채 가족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이렇게 품위 있게 나의 마지막을 맞이하고 싶다. 폼나게 죽겠다는 것이 아니라 존엄하게 죽고 싶다는 뜻이다. 삶이 허락하는 날까지 의미 있는 삶을 살다가 아름답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 어떻게 하면 존엄하게 삶을 마무리할 수 있을까? 먼저 최소한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중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전의료연명의향서를 작성하여도 실제 병원 현장에서는 가족들의 의향을 다시 묻고 절차도 복잡할 뿐만 아니라 환자의 자기 결정권이 무시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품위 있는 죽음을 위한 나의 의지를 표현한 공적 서류이니 준비할 필요가 있다. 치료는 자식 된 도리와 함께 의사의 사명감으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단 중요한 조건이 있다. 회복가능성이 있을 때 만이다. 치료가 통하지 않고 죽음의 시점만 늦추고 고통만 가중된다면 무의미한 치료는 중단하고 인간으로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게 최선이다. 그 순간의 판단이 쉽지 않겠지만 가족이 함께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 그리고 뭐가 더 있을까?


유언장이다. 유언장에는 물론 내가 남길 자산을 공평하게 기록할 것이다. 어느 장례식장에서 시누이와 올케가 어머니가 남기고 간 통장의 금액을 두고 신경전을 벌이는 것을 눈으로 목격했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이런 경우가 허다할 것이다. 유산이 작으면 작은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미리 정리를 하지 않으면 갈등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래서 유언장을 아내와 자식들에게 보여줄 것이다. 미리 상의를 하는 것이다. 잘 못된 것이 있으면 고치면 된다. 일부는 내가 도움을 받은 사회에 기부할 계획이다. 물질적인 유산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유산도 남겨주고 싶다. 이 책이 그 정신적인 유산이 되리라 희망한다.


임종이 다가오면 가능한 집으로 와서 생을 마감하고 싶다. 한때 막연하게 스위스에 가서 조력사를 선택할까 했다. 하지만 <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라는 책을 보고 그곳 또한 낯선 곳이고 가족들에게 번거로움을 주겠다 싶어 포기했다. 어떻게 죽을지 아무도 모른다. 단지 중환자실에서 온갖 생명연장기계를 달고 죽고 싶지 않다. 그런 상황이 온다면 내가 의식이 있는 한, 단호히 거절할 것이고 만약 의식이 없으면 가족들이 나의 평소 의지를 의사에게 강력하게 전달하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장례식이다. 나의 장례식에 올 사람의 명단을 미리 작성할 것이다. 장례식장이 조금 썰렁해도 괜찮다. 오로지 나를 위해 추도할 사람들만 모여서 추모의식을 갖췄으면 한다. 부의금은 받지 않도록 내가 미리 장례비를 준비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묻힐 추모공원이다. 그곳은 내가 사는 가까운 곳에 시설이 좋은 추모공원이 여러 곳이 있다. 미리 그곳을 방문하여 내가 묻힐 터를 잡아 두고 아내도 함께 묻히도록 준비할 것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게다.


장례식장에는 내가 제작한 영상을 틀어주면 좋겠다. 어릴 때부터 나의 삶을 정리한 영상을 만들 계획이다. 배경음악까지 함께 담아둘 테니 그 영상을 틀어주면 된다. 내가 쓴 시와 캘리그래피도 함께 전시해 주면 더욱 좋겠다.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했고 아름답게 죽음을 마무리하는 것이 삶의 완성이라 생각한다. 이 글이 나의 엔딩노트이기도 하다. 앞으로 세월이 흐르면서 수정이 필요하겠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의 품위 있고 존엄한 죽음을 위한 나의 엔딩노트이다.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 더, 혹시 내가 정신이 혼미하고 상대를 잘 못 알아본다고 “내가 누군지 알아요?’ 같은 질문은 하지 말기 바란다. 그게 얼마나 큰 스트레스를 주는지 안다면 이렇게 얘기해 주면 좋겠다. “제가 아들 혹은 딸 ** 예요”하고 말이다. 마지막까지 청각과 촉각은 살아있다고 하니 손을 잡으면서 귀에다 대고 속삭여 주렴 이렇게,


“당신을 사랑했고 덕분에 너무 행복했어요, 그리고 천국에서 다시 만나요”라고 말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익숙한 일상으로부터 탈출하는 일탈을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