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낯섦과 익숙함
“목소리는 하나인데 아침에는 네 발로 걷고, 낮에는 두 발로 걷다가,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동물이 무엇이냐?”
무엇일까?
처음 이 수수께끼를 들었을 때, 왠지 동물이라는 조건에 일단 인간은 제외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스 3대 비극 작가 중의 한 사람인 소포클레스가 지은 <오이디푸스 왕>에 나오는 대사 중에 있다. 비극의 주인공인 오이디푸스는 ‘인간’이라고 정답을 말하면서 스핑크스를 물리치고 테베의 왕이 된다. 이 수수께끼는 사람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성인이 되어 열심히 살아가지만 노년을 맞이하면서 결국 병들어 죽어가는 인생의 숙명을 의미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이기에 역경에 도전하면서 살지만, 결국 그 운명을 겸허하게 받으라는 철학적 의미도 담고 있다.
왜 나는 2,500년이나 지난 지금, 바다 건너 그리스에서 경연한 비극을 떠올리고 있나? 그리스 비극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사필귀정이나 권선징악과 같은 교훈이 없다. 단지 인간 심연에 있는 본성과 욕망을 가감 없이 상징적인 에피소드를 통해 드러내고 운명적인 시련을 감당해 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과학기술과 인공지능이 발달한 현대 문명을 사는 우리의 삶과 인간의 본능은 2,500년 전과 달라진 것이 전혀 없다. 현대인의 삶도 그리스 희곡처럼 극적인 요소가 많아 말 그대로 한 편의 연극으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 사람의 인생을 글로 쓰면 한 트럭을 채운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나의 삶 역시 돌이켜보면 크고 작게 극적인 인생을 살아왔다.
인생은 말 그대로 한 편의 연극과 같다. 우리는 무대 위의 배우이자 타인의 삶을 관찰하며 성찰하는 관객이기도 하다. 그리스 비극을 접하면서 오직 한 번만 살 수밖에 없는 유한한 인간인 내가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주어진 한계를 넘어서려고 할 때만이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다. 마지막 호흡을 하는 순간, 나는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지금 인생 ‘3막’에 들어가고 있다. 1막은 태어나 교육받고 삶의 토대를 형성하는 시기다. 2막에서는 가정을 꾸리고 세상에 나가 경쟁하면서 살아가지만,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이 앞을 가로막기도 한다. 연극에서 주인공이 거친 운명을 맞닥뜨리면서 고통을 겪고 갈등을 해결하는 에피소드와 무척 닮았다. 이제 마지막 3막에서는 삶의 의미를 찾는 지혜를 쌓고 나를 더 알아가면서 행복을 누리며 살고 싶다.
겨울 아침, 28년 간의 교직생활을 끝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오랜만에 창가에 앉는다. 햇살이 따스하게 거실 깊숙이 밀려온다. 따스한 햇살을 품에 안고 잠시 눈을 감았다 다시 뜬다. 꽃송이채 탁자 위에 떨어져 있는 동백꽃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다른 꽃송이들은 한껏 생명력을 뽐내고 있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생명의 뿌리에서 빠져 스러지고 있다. 생명을 다하고 사라지는 그 순간에도 꽃송이가 아름답다. 동백은 멋있게 가는구나. 문득, 나도 저렇게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다시 생각한다. 포근한 엄마의 품을 떠나 낯선 세계와 맞닥뜨리고, 차츰 익숙함에 안정을 누리면서 살다가, 어느 날 문득 죽음이라는 또 다른 낯섦이 기다리는 것이 삶의 여정이다. 낯섦을 두려워하기보다 그것을 받아들여 오히려 변화와 성장의 기회로 삼고, 일상의 익숙함 속에서도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며 끝없는 호기심과 배움의 자세를 가질 수 없을까?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죽음이라는 또 다른 낯섦 앞에서도 삶을 온전히 살아낸 흔적을 남길 수 있지 않을까?
교직생활에서 은퇴하는 이 시간에, 나는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고 싶은가? 나에게 물어본다. 남아있는 삶에서 새롭고 신선한 경험을 통해 일상을 의미 있게 변화시킬 수 없을까? 육체는 어쩔 수 없이 퇴행하지만 나의 감정을 표현하고 무디어진 감각을 고양시켜 삶을 쇄신하고 싶다. 케케묵은 타성에 젖은 나를 성찰하면서 삶을 다시 새롭게 정돈하고 나의 가능성을 발견하여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찾으려 노력했다. 인생 3막에서는 창작활동인 글쓰기가 그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을 것 같다. 글을 쓰다 보면 머리 위로 떠다니던 감정과 온갖 상념들이 자기 자리를 잡은 듯 정리가 되고 마음이 차분해진다.
일상에서 마주한 경험과 풍경을 되돌아보는 일, 그것을 나의 생각과 감정의 실체로 다시 떠 올리고, 그 감정을 글로 표현하고, 그 글로 오늘의 나를 돌아보고, 내 삶에 변화를 줄 때 삶의 충만함을 느낀다. 나의 성찰로 생겨난 낯섦, 탐미, 호기심, 사랑과 그리움을 글로 표현하면 마치 피그말리온 효과처럼 내가 쓴 글 대로 살아가려는 의지가 강하게 생긴다. 말이 씨가 되듯이 글도 씨가 되어 내 삶에 변화를 주고 다른 사람도 공감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글을 쓰고 시를 읽고 그림을 감상하는 일이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나 허영심의 표현이 아니라 삶에 새로운 의미를 탐색할 수 있게 해 줄까? 은퇴 후에는 어떻게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 은퇴자금으로 평생에 하고 싶었던 취미생활을 하고 여행 다니는 것을 꿈꾸는 은퇴자가 많지만 생계유지라는 경제적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많지 않다. 자본의 힘이 수익을 추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극대화를 하는 냉혹한 세상에서 이런 한가한 생활방식이 부질없는 짓은 아닌가?
퇴직 후에도 의미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더더욱 소외된 삶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경제적 제약과 함께 인생의 유한성을 극복하면서 삶에 주체성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가능이나 할까? 그 가능성에 대한 실마리를 영화에서 찾는다.
영화 <패터슨>에서 주인공 패터슨은 미국 뉴저지주의 작은 도시 패터슨에서 버스기사로 일한다. 매일 아침 6시 15분에 눈을 뜨고 도시락을 들고 출근하는 무한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패터슨은 자신만의 창작의 시간을 가진다. 운행 직전에 운전석에 앉아 시를 구상하고 점심시간에 벤치에서 시를 쓴다. 패터슨은 일상의 무의미한 반복 속에서 삶이 어떻게 예술이 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일상이 창조의 시간이 된다.
나도 가능할까? 시인이 아니어도 시를 쓸 수 있을까? 그것도 공학도 출신이 말이다. 시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시를 써보는 것이라고 했다. 생의 3막에서 새로운 실험을 한다. 살면서 누구나 말로 전할 수 없는 진심과 마음 깊은 곳에 잠긴 감정을 표현하고 싶을 때가 있다. 삶에서 고난이 찾아올 때 그 아픔을 마냥 마음속으로 꾹 누를 수도 없고, 주절주절 말로도 담아낼 수 없어 답답할 때가 있다. 누군가 시인도 아닌데 하고 비웃어도 상관 않겠다. 다시 한번 내가 살고 싶은 삶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삶의 기쁨과 고통까지 시와 캘리그래피로 나를 표현하고 싶다.
오래전, 이창동 감독의 <시>와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를 주인공으로 한 <일 포스티노>라는 영화를 보면서 나도 언젠가 한 번은 시를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죽기 전에 가고 싶은 여행지는 포기하더라도 죽기 전에 시 한 편은 꼭 쓰고 싶었다. 살아가는 일이 힘들고 팍팍할수록 시상을 떠올리며 상상한다. 시는 일상의 평범한 시간 속에서 태어난다. 낯선 마음으로 노트북의 자판을 두드린다. 시와 캘리그래피가 만나 조화를 이루면서 전혀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해 낸다. 내 생의 실험 프로젝트를 직접 만들어 본다.
나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도 좋지만 남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이 질문은 50대 중반을 지나면서 고민했었다. 은퇴 후, 심리상담을 배워서 타인의 어려움을 들어주고 공감하면서 치유할 수 있으면 어떨까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 생각을 잡아서 이제 실천에 옮기길 원한다. 특별히 노년기에 접어든 사람들이 겪는 심리적, 정서적, 사회적 문제를 도울 수 있는 역량을 갖추기 위해 대학원 과정과 노인심리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실습과 현장 경험을 쌓으면서 봉사하고 싶다. 이번 가을 학기에 학위과정에 등록하려고 한다. 노인 상담은 단순한 심리치료가 아니라 삶의 마지막을 더욱 의미 있고 존엄하게 살 수 있도록 돕는 일이기 때문에 전문적인 지식과 함께 따뜻한 마음과 지속적인 배움이 자세가 필요하겠다. 이것이 내 삶의 마지막 실험이 될 것이다.
삶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생명과 창조 의지는 한 개의 소실점을 향하고 있다. 바로 존재의 소멸이다. 영원한 침묵으로 들어가는 죽음을 생각한다. 언제 어떻게 닥칠지 모를 절대 침묵의 세계인 죽음이라는 낯선 손님을 맞이할 때, 그 죽음을 수용하고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죽음의 순간조차 내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그것은 남은 가족들의 몫이 된다. 다만,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내가 준비할 수 있는 것은 미리 글로 남겨 가족들이 상실감 속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나의 죽음을 대면할 수 있으면 좋겠다.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삶의 고귀함을 느낀다. 세상 떠나고 난 다음에 매년 지내는 기제사보다 살아있을 때 서로 소중하고 즐겁게 대하고 싶다. 고인이 되신 부모님, 장인어른과 가족의 생일날을 기억하여 함께 외식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정신없이 살다가 어느 날 죽음을 앞에 두고 당황하고 후회하지 않고, 미리 내 삶의 가치를 담은 기억을 기록으로 남겨두길 원한다. 임종을 앞둔 단계에서의 <엔딩 노트>가 아닌 지금 이 시간, 건강할 때 내 삶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나의 생각을 시, 캘리그래피, 그리고 수필로 기록한다.
결코 내 자랑이 되지 않고 나를 돌아보고 글로 쓰면서 타성에 찌든 나를 다시 성찰하는 시간이 되어 삶에 새로운 생각이 싹트기 바라는 마음이다. 삶이 힘겨워도 웃을 수 있는 것도 현재의 삶에서 가능하다. 인간의 생애는 나 스스로 기록하지 않으면 마치 살지 않았던 것처럼 흔적 없이 잊히고 만다.
자녀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지 유산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다. 유산으로 물질적인 자산만 아니라 아빠가 살아온 삶의 흔적과 가치를 전해주고 싶었다. 사랑하는 딸과 사위에게 아빠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얘기하고 싶지만 자칫 잔소리가 되기 때문에 글로 전하려 한다. 내가 이 세상에 없는 그날에도 자손들이 나와 아내의 생일날에 모여 이 책을 들춰보면서 즐겁게 식사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오래 몸담은 교직에서 은퇴하지만 다시 상담심리학을 배우고, 일하고, 사랑하고, 아름다움을 찾는 마음으로 살아가려 한다. 이 마음이 나의 자녀와 이 글을 읽을 독자들에게 전달되길 희망한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결단하는 삶이 나를 구원하는 또 다른 길이 아닐까? 이제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하는 인생 3막의 낯선 길을 나와 동행하지 않으시겠는가?
소포클레스는 지금도 나에게 묻는다. '네 운명 앞에 지금 너는 어떤 삶을 선택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