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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규스케 Jun 09. 2020

손 (글 ver.)

뭐든지 펼칠 수 있는 백지 앞에서 손을 움직일 수 없다는 건

손이 움직이질 않는다. 노트북 위에 손이 멈춰있다. 모니터에는 ‘자기소개서’라는 글자가 떠 있다. 나를 소명해야 하는데, 할 말이 없다. 백지의 압박감이 느껴진다. 분명 1년 전에는 안 그랬다. 그때는 꿈에 가득 차 있었다. 뭐든 말할 수 있었다. 자판을 두드리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타닥타다닥 자판 치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럴까. 나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기자가 왜 되어야 할까. 물론 이런 말은 쉽게 내뱉을 수 있다. “권위를 타파하고 싶어요. 약자의 편에 서고 싶어요”. 그런데 왜 권위를 타파하고 싶은지, 왜 약자의 편에 서고 싶은지, 기자가 되면 무슨 보도를 하고 싶은지, 그리고 그 많고 많은 지원자 중에 왜 꼭 나여야 하는지 나는 말할 수 있을까? 끝없는 질문의 폭포에 휩쓸려 떠내려간다.


1년간 회사생활을 하면서 미래를 향해 달려간다는 느낌보다는 하루하루를 소비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종일 손은 마구 움직였지만, 이 손이 내 의지로 움직이는지 상사의 지시 혹은 조직 문화, 사회적 관습에 의해 움직이는지 헷갈렸다. 내 손이었지만 내 손이 아니었다. 1년간 내 손을 스스로, 주체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면서 뇌도 멈췄다. 점점 눈동자에 초점이 흐려졌다.

뭐든지 펼칠 수 있는 백지 앞에서, 누군가의 조종이 없는 스케치북 앞에서 마음대로 인생의 그림을 그릴 수 없는 모습이다. 그 많던 꿈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 많던 감정은 다 어디로 갔을까. 눈물조차 메말랐다. 이제 선택을 할 때가 왔다. 그 시작은 퇴사일지 혹은 하나의 글일지, 하나의 콘텐츠일지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다. 내 손을 내 의지로 움직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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