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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황(23.02.07)

조그마한 전파상

아침, 아니 그 보다 조금 더 일렀으니 새벽의 끝자락이라 해야 할까. 침대에서 일어나 어둠에 누우니 달이 예뻤다. 연초를 끊은 탓에 허전한 손이 플라스틱 전자담배를 입에 가져갔다. 예쁘장한 전자담배가 성인을 위한 장난감 젖꼭지 같다. 새벽 공기를 가르고 은하수를 내려고, 장난감 젖꼭지가 연기를 흩뿌렸다. 겨울이 물러가는 탓인지, 연기에 젖은 달마저 포근해 보인다. 물론 그래도 여전히 정월인지라, 뜨끈한 집에서 자빠져 자던 대학원생에게는 쌀쌀하다. 보일러가 동파 직전까지 몰렸던 재작년 이후로, 겨울에는 꾸준히 난방을 돌리고 있다. 지난달에 난방비가 팔만원 하고도 구천 원이 더 나왔지만서도 수도 계량기에 뜨거운 물을 부어대고, 난로를 가져다가 파이프에 대고 틀어두고, 마침내 사람을 불러 관을 녹여대던 일은 다시 겪고 싶지 않다.


오늘은 아침밥을 해먹고 아침 운동을 가려했는데 깜빡 잠이 들어 버렸다. 어젯밤을 새운 탓이다. 어찌 밤을 새웠냐 한다면, 주말에 일을 다 못했기 때문이다. 주말에 사람들을 만나선 술을 먹고 또 술을 먹었기 때문이다. 다 내 탓인 것이다. ‘윤 공, 어찌하여 주말에 일을 해야 한단 말이오?’ 누가 묻거들랑 대학원생 한을 담아 한 대 쥐어박고 싶다. 요즘 들어 부쩍 폭력적인 생각을 자주 한다. 과거의 나는 폭력성을 내부로 돌려 나 자신과 분투했으나, 요즘은 그 폭력성이 외부로 향하는 듯하여 걱정이 많다.


매일같이 남의 배때지에 쇠붙이를 꽂아 넣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이가 차다 보니 내 몸 귀하게 여기는 마음은 불쑥 든다. 다음 주에는 건강검진을 받을 예정이라 배때지에 내시경을 꽂아 넣는 쪽은 내가 될 것 같다. 아침에는 영양제를 챙겨 먹는데, 눈과 간에 좋다는 약, 종합 비타민, 수면 장애 완화제까지 네 가지를 한 번에 삼킨다. 이것들 중 내 돈 주고 사본 것이 하나도 없어서인지 나는 이것들의 효능이 어떠한지 잘 모른다. 잘 모르는 것들에 일상에 한 켠을 내어주는 것 같아서 열패감이 들지만, 일상을 제압해서 얻을 것도 이제는 별로 없다. 그보다 중한 것이 이걸 사서 건네는 사람들의 마음이라고, 보답하자고 생각한다.


어제보다 조금 홀쭉해진 것은 내 가진 화와 심술이고, 그 모양이 보름에서 그믐으로 미끄러지는 저 달을 닮았다. 아직도 퇴근하지 못한 대학원생은 저 달이 더 홀쭉해지기 전에 논문을 마저 끝낼 생각이다. 부끄럽게도 내게는 더 이상 학구적인 마음이 없다. 논문을 다 쓰고, 달이 모습을 감추고 다시 드러내고, 수없이 많은 밤을 비겁하게 지새우고. 그러고 나면 조그마한 전파상에서 기타 줄을 튕기는 노인이 될 수 있는지. 그쯤에는 내 가진 애정을 모두 집착과 맞바꾸어 버린 것은 아닐지. 그래도 그 낡은 전파상에 손님 하나 찾아올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요즘 내가 빠진 즐거움이다. 손님 맞이 하려거든 일단은 졸업을 해야겠으니 다시 다른 글 마저 쓰러 간다. 참으로 엉뚱한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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