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만남
내 인생에 중국어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열다섯 여름이었다.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을 코앞에 두고 불쑥 '방과 후 수업'이란 것이 생겼다. 그때만 해도 정규 교과 과정 이외에 무언가를 배우는 일이 드물었다. 교육청에서 우리 학교를 시범 운영 학교로 지정했고 우리 학교에는 5개의 수업이 개설되었다. 중국어, 일본어, 기타, 배드민턴, 리듬 줄넘기. 큰 고민 없이 나는 중국어를 선택했다. 독도는 우리 땅 표어 대회를 마친 직후라 일본어는 싫었고, 기타보다는 피아노를 좋아했고, 작은 공 큰 공 상관없이 공놀이는 젬병이었다. 댄스 스포츠라면 모를까 노래에 맞춰 춤도 아니고 줄넘기를 하다뇨! "전 중국어 할래요!"
'운명'인 줄 알았던 중국어와의 만남은 찰나의 '광명'이 되었다. 일주일에 세 번짜리 중국어 수업이 정확히 2주 만에 막을 내린 것이다. 이유인즉슨 '저조한 참여율'과 '교육청 지원 중단'. 시범 운영 학교들에서 큰 반응이 없었는지 재검토에 들어갔단다. 나는 이주일 동안 딱 두 단어를 배웠다. '마'와 '빠'
"중국어에는 4개의 성조가 있어요. 자 따라 해 볼까요"
"마→ 마↗ 마↘↗ 마↘"
그렇다. 다음 주는 빠아 빠아 빠아아 빠! 였다.
우리가 다시 만난 것은 3년 후 여름이었다. 대부분의 고등학교는 문과와 이과에 상관없이 제2 외국어를 배웠다. 선택할 수 있는 언어는 학교마다 달랐는데 나는 옆 동네에 잘생긴 불어 선생님이 있단 소식에 이미 설레고 있었다. 아, 그러니까 '외국어를 배우는 시간'을 몹시 기다렸다는 뜻이다. 본디 실망은 헛물켠 자의 몫이라고 했던가. 나의 모교에는 이모 또래의 '중국어 선생님'과 아빠 또래의 '일본어 선생님'이 계실 뿐이었다. 그래도 구면이라고 나는 중국어를 선택했다.
중국어 수업 시간은 발음을 떼자마자 국영수에 밀려 줄었다. 그 잠깐의 시절, 나는 중국어를 참 좋아했다. 끝이 없는 국영수 사막에서 발견한 오아시스 같았달까. 미적분은 도통 아는 척을 할 수가 없는데 잠깐 배운 중국어는 복도에서 '라우싈 하오(老师好)' *선생님 안녕하세요*하고 배운 티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 후 내 중국어 실력은 고작 '만나서 반가워요(见到你很高兴)'와 '넌 무엇이 먹고 싶니?(你想吃什么?)'를 구사하는 정도였다. 만나서 반갑다고 인사도 하고 메뉴에 대한 의사도 묻고. 처음 배우는 외국어는 참 예의 바르다.
초등학교 동창처럼 다시는 만나기 힘들 것 같았던 중국어와의 재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재수를 고민하던 나는 대학생활에 영 흥미가 없었다. 어차피 재수 준비를 위해 짜 놓은 시간표는 말 그대로 시간에 맞춰 짜 놓은 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중에 하나가 '교양 중국어'였다. 이름도 우아한 이 수업은 공대생부터 체대생까지 모두 들을 수 있다는 기초 중국어 수업이었다. 재미없는 대학생활에 맘 붙일 곳 없는 나였지만 '고3 본능'이 고스란히 남아 몸은 강의실에 착실히 붙이고 앉아 있었다. 하루는 교수님을 쳐다보고 다른 하루는 책을 쳐다보고 과제도 하다 보니 어라? 맨 뒷줄에나 앉던 내가 슬그머니 앞 쪽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다. 한국어로 세 줄이나 되는 문장이 한 줄로 깔끔하게 정리되는 마법. 듣다 보니 우울한 기분도 살짝 풀리는 업템포의 발음. 무엇보다 왠지 모르게 불청객 같았던 한국어 속의 한자가 떳떳하게 주연 자리를 꿰찬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에서야 하는 소리지만 난 그저 마음 붙일 곳이 필요했다. 강의 전에 착실히 가 앉는 몸이 아니라, 기꺼이 다시 무언가를 배우고자 하는 마음. 침잠한 바위 같은 마음을 일렁이게 할 무언가가 간절했다. 스트레스는 노래방에서, 우울함은 매운 걸로 푸는 단순한 애가 되지 못한 나는 제법 긴 시간 동안 나를 가뒀던 것이다. 봄바람을 타고 캠퍼스는 이내 파스텔 빛으로 물들었지만 내 계절은 수묵화에 가까웠다. 감았던 눈을 떠도 암흑 속으로 빠져 들었다. 그 깜깜한 밤 속에서 겨우 찾아든 반짝임이 중국어였다. 신입생의 설렘은커녕 하루, 한 주가 버거웠던 나에게 '다시 무언가를 해보고 싶습니다-'라는 마음이 생기는 동안 깊은 곳의 짙은 어둠은 서서히 걷혔다. 그래서 나에게 중국어가 어떤 의미냐고 묻는다면 제가 처음 찾은 북두칠성입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열다섯, 다섯 가지 중에 망설임 없이 고른 것도
열여덟, 국영수 사막에서 마주한 오아시스도
스물, 길 잃은 나에게 길잡이가 되어준 것도 중국어였다.
어린 나는 몰랐겠지, 찰나의 선택이 훗날 꽤 오랫동안 내 북두칠성이 된다는 것을.
그래서 나에게
중국어가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제가 처음 찾은 북두칠성입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