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책 좀 읽자. 밑줄도 좀 긋고. 빌린 책이지만 감히 내 책으로, 새 책으로 사서 주면 될 일. 1부 2편 <소크라테스처럼 궁금해하는 법> 읽으면서 몇 차례 머물기를 반복했다. “인생에서 길을 잃는 수많은 순간마다 이 철학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표지에 내세운 문장이다. 이쯤이면 철학, 그 누구도 쉽게 외면할 철학책 아니런가. 그런 철학책이 이처럼 재밌고 즐거워도 된단 말인가. 이 책을 내게 소개한 사람의 권유가 그토록 싱거웠던 게 말이 되는가, 내심 째려본다. 그래, 설레발 멈추고 어떤 내용이기에, 어떤 문장에 맞서 이 호들갑인지, 같이 읽어보자.
나는 궁금하다. 짧은 두 마디 말이지만 그 안에 모든 철학의 씨앗이, 그 이상이 담겨 있다. 모든 위대한 발견과 돌파구는 이 두 마디 말에서 시작된다. 나는 궁금하다. (42쪽)
철학은 실용적이다. 필수적이다.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였던 키케로는 이렇게 말했다.“소크라테스는 처음으로 철학을 하늘에서 끌어내려 마을에 정착시켰고, 철학을 사람들의 집 안으로 불러들였다.” (50쪽)
우리는 종종 궁금해하는 것과 호기심을 같은 것으로 여긴다. (…) 호기심은 가만있질 못하고 늘 눈앞에 나타나는 다른 반짝이는 대상을 쫓아가겠다면 위협한다. 궁금해하는 마음은 그렇지 않다. 그 마음은 오래도록 머문다. 호기심이 한 손에 음료를 들고 안락의자에 앉아 편안하게 발을 올려둔 것이 바로 궁금해하는 마음이다. (55쪽)
좋은 철학은 느린 철학이다. (…) 멈춤은 텅 빈 것이 아니라 잠시 유예된 상황이다. 생각의 씨앗이다. 모든 멈춤은 인식의 가능성, 그리고 궁금해할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 (57쪽)
니들먼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문화에는 궁극적인 질문이 질문으로 존중받는 공간이 없어요. 우리가 가진 모든 제도와 사회 양식은 문제를 해결하거나 즐거움을 제공하는 데만 최선을 다합니다.” (63쪽)
진한 명조체, 빨간색 글씨, 좀 과하게 문장을 추렸다.
소크라테스, 좀 멋지지 않은가. 철학을 하늘에서 끌어내렸다니, 마을에 정착시켰다니, 사람들의 집 안으로 불러들였다니. 너 자신을 알라,를 앞세운 철학자, 것도 어느 시대 오래된 사람인지 가늠조차 어려운 이, 그가 철학을 하늘에서 끌어내렸다는 그 낭만과 실용의 패기. 그 문장을 덥석 물었다. 이유랄까,
내 공부가 그렇다. 하늘에서 끌어내려야 할 이유, 설명은 늘 부족하지만 마음만은 그 사명과 잇닿아 있다. 마을로, 집 안으로 철학을 불러들였던, 철학은 실용적이다. 그의 선언(이라 해두자)에 심장 쿵쿵한 이유, 이 책을 감히 모두에게 읽어보십사, 관념의 철학이 아니기에 주저하지 말고 읽어보라고 권한다. 열넷의 철학자 중 겨우 두 명 만나고 이런 호들갑, 모처럼 느끼는 것이니 박승용을 아는 이는 알아서 하시길. 구태여 사족을 덧붙인다면, 신학은 실용적이다, 라는 정체불명의 공부 방향과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고 여겼다. 감히 하늘에서 끌어내려야 할, 우리 사는 동네로, 우리 사는 사람들 사이로, 그곳에 머물러야 할 신학이자 카리타스학, 사회복지이어야 하리라.
나는 궁금하다. 호숫가에 비친 하늘, 그 하늘에도 사람이 살고 있을 터, 더디고 느린 걸음을 걸어야 겨우 발견할 사람, 사람 그림자. 바쁜 걸음으로 내쳐 어딘가로 향하는 삶의 속도에 맞서 한 번쯤은 우러러볼 하늘대신 내려다볼 하늘이어도 좋으리라. 하늘빛 물든 호숫가에 경외하고 숭앙할 만물, 어디 사람뿐이랴. 궁금해하는 마음, 호기심이 한 손에 음료를 들고 안락의자에 앉아 편안하게 발을 올려두고 멀리 호숫가 바람 머문 자리, 바람 지나는 길, 그 소리에 귀 기울일 지다. 좋은 철학은 느리다. 좋은 삶도 느리다. 느려 터져야 궁금할, 궁구할, 궁극을 궁리할, 다하여 달할 궁(窮)에 가닿지 않을 텐가. 나는 궁금하다.
강남순 교수의 <질문 빈곤 사회> 책이 연결되었다. 궁극적인 질문이 질문으로 존중받는 공간이 없다는 것, 빈곤한 사회다. 호기심과 상상은 엉뚱함으로 무리에서 나뉜다. 왜, 라는 물음은 질시와 질타의 매서운 눈초리 앞에 감추기 급급하다. 분명한 것, 질문은 당황과 당혹을 넘어 침묵과 성찰, 통찰의 순으로 이어간다. 여쭙는 일보다는 따져 묻는 일, 이런 화급의 속도를 잠시 떠올렸다.
소크라테스처럼 궁금해하는 법, 각자의 모양으로 궁금했다. 묻기도, 보기도, 듣기도, 그렇게. 철학이라 불리는 걸 주저하는 사람, 내 인생에 소크라테스 질문법과 궁금법을 즐겨 노래하는 법으로 무턱대고 받아 안을 일이다. 찻잔에 띄운 호기심 호호 불어가며 쓰디쓴 커피에서 산미의 향미를 따로 꺼내 환영할 뿐이다. 거 앞에 앉아 하릴없이 스마트폰 바라보는 사람, 그 사람 누군가,
그에게 귓등으로 듣든, 이 책의 묘하고 묘한 향미를 거듭 전하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어떤 책은 날 춤추게 한다. 어쩌면 그도 그럴까. 그랬으면, 그랬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