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윙크의사 May 02. 2023

5년 일기

다시 입원하게 되면서, 준비물로 방구석에 묵혀 있던 ‘5년 일기장’을 꺼내 왔다. 5년 전, 친구의 추천으로 구입하게 된 5년 일기장이다. 친구는 5년 일기를 쓰면서, 매년 같은 날의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또 무슨 깨달음을 얻으며 살아왔는지 과정을 볼 수 있어 너무 좋다고 했다. 


2019년의 나는, 경험과 여행을 통해 자유롭게 세상을 탐구하는 1년을 보낸 후, 힘들기로 유명한 내과 레지던트 입국을 앞둔 상태였다. 당시 내가 해결하고 싶었던 삶의 질문은 ‘개인의 소소한 행복과 여유, 그리고 커리어의 성공과 성취가 공존할 수 있는가’였다. 


‘모 아니면 도’ 식의 사고를 하던 어린 나에게, 질문의 답변은 No였다. 인간의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를 어디에 쏟을지 선택하는 과정이, 그 사람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개인의 행복과 일과 관련된 성공은 반대 방향을 가리키는 화살표라 믿었기에, 결국 다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이 스스로 내린 결론이었다. 


그렇게 내과 레지던트 과정을 시작한 후, 나는 예상보다 훨씬 더 정신없이 살았다. 환자를 돌보는 일과 의료계 활동 모두, 손 놓으면 무너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일들이었다. 남들보다 2배는 바삐 돌아가는 24시간 속에서, 나는 스스로 한쪽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았고, 바쁨으로 비롯된 성취가 가끔 가져다주는 쾌감에 억지로 위안하며 지냈다. 


2023년의 나는, 한쪽 눈을 잃은 상태로 병원에서 새해 명절을 맞이하였다.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한 치료 과정을 앞두고 분명한 것은, 약속과 일을 구겨 넣는 바쁜 삶을 더 이상 이어가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다. 욕심부리는 나를 점검하고 중심과 균형을 잡는 일이야말로 현재의 나에게 가장 중요한 미션이 아닐까.


어렸을 적보다 유연하고 깊어진 지금의 나는, ‘개인의 행복 vs. 커리어의 성취’라는 질문의 답이 어쩌면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닐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억지로 방향을 나눠 화살표를 긋고, 한쪽을 향해 채찍질하는 과정은 틀림없는 흉터를 남긴다. 세상에 완벽한 인간은 없기에, 그래서 한쪽을 포기할 필요도 없다. 


적절한 조화와 균형을 통해 만족하는 삶. 성과가 아닌 의미를 쫓는 삶. 맡은 일에 책임을 다하며 주변도 돌아볼 줄 아는 삶. 앞으로의 몇 년은 그런 삶으로 채워 보려고 한다. (5년은 너무 길어서 3년 일기장을 새로 샀다ㅋ) 

매거진의 이전글 생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