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근대 회화의 문을 비틀어 연 전통 화가가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1861~1919)입니다. 조선 말에서 대한제국, 일제 치하로 이어지는 변화무쌍한 시기, 조선의 마지막 화원화가 안중식은 더 이상 왕실의 명을 받드는 그림을 그릴 수 없었습니다.
사실 그는 당대의 자유분방한 천재화가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1843~1897)의 아끼는 제자이기도 했습니다. 장승업은 현동자 안견, 단원 김홍도와 함께 조선 3대 화가로 불리기도 하는 명가였습니다. 속도감 있고 힘 있는 필치가 대상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반해 큰 부자가 되었고, 민영환이 고종에게 소개하여 도화서의 화원으로 특별 채용되기까지 할 정도로 대단한 화가가 인정한 제자가 안중식입니다.
유난히 먹빛이 진하고 투명한 그림, 「성재수간(聲在樹間)」은 안중식 말년의 화풍으로, 참으로 힘이 넘치고 현대적입니다. 짙게 혹은 연하게 번지는 먹의 농담 뿐 아니라 가늘게 툭툭 찍어 던지는 잎들 하나하나에서 힘이 넘칩니다.
투명한 먹의 두루마기를 입은 소년 하나가 두 나무 줄기 사이로 밖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싸릿문 밖에 누가 왔는가 살피고 있다. 소년의 등 뒤에는 불을 밝힌 작은 방이 하나 있는데, 수염을 길게 기르고 높은 탕건을 쓴 선비의 그림자가 비추입니다. 이 선비의 이름은 구양수(歐陽脩, 1007~1072)), 중국 송나라의 문인입니다. 그는 지금 〈추성부(秋聲賦)〉를 짓고 있음에 분명합니다. 이 그림은 이 시의 내용을 그린 것이니 말입니다.
구양수가 깊은 밤 글을 읽고 있는데 밖에서 서늘한 소리가 들려 하인 소년을 불러 혹여 누가 왔는지 물어보라 하니, 소년은 밖을 살뜰히 살핀 후, “별과 달은 밝고 깨끗하며, 은하수는 밝아 하늘에 가득한데, 사방에서 사람의 기척은 없고, 바람 소리는 나무 사이에 있을 뿐입니다.”라는 말을 전했습니다. 그림의 제목인 「성재수간(聲在樹間)」은 ‘바람 소리는 나뭇가지 사이에 있다’는 문장을 따 붙인 것입니다.
우리나라 현대 가야금의 일인자, 창작 국악 작곡가인 우주(紆州) 황병기(黃秉冀, 1936~2018)는 「성재수간」을 우연히 보고 흐르는 영감을 이기지 못해 바로 〈밤의 소리〉를 작곡했습니다. 달빛 가득한 마당을 가득 채운 바람의 소리가 변화무쌍하게 일어나고 결국에는 소멸합니다. 그림 한 장이 주는 힘이 2024년 현재의 저와 다르지 않았던 법이더랍니다.
안중식은 나중에 심산(心汕) 노수현과 청전(靑田) 이상범이라는 현대 동양화가의 두 최고봉을 길러냈습니다. 두 사람의 아호는 각기 안중식의 호 ‘심전(心田)’에서 각기 하나를 나누어 딴 것이라고 합니다. 그림의 힘이 음악으로 흐르고 스승의 애정이 제자에게 흐릅니다. 예술은 한 곳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이 마음이 흐르듯 예술의 힘은 확장되고 넘쳐 흐릅니다. 소중한 바람 소리가 찾아왔습니다. 바람 소리는 넘쳐 흘러 곧 떠나갑니다. 예술의 진리는 항상 동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