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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펀치 Jan 04. 2020

강펀치 in 로마니에미 (9)

녀석 아주 근사한 하루를 보냈나 본데

1. 지금 시간은 새벽 2:35 로마니에미 시내의 카페 코티 호스텔 안이다. 하루 저녁에 고품격 캐빈 방에서 호스텔로 떨어져 샤워도 제대로 못 하고 누워있자니 기분이 안 좋을만도 한데, 오히려 이 설레는 기분을 잃어버릴까 조심조심 폰으로나마 글을 남기고 있다.


‘오로라가 안 뜨면 만들어서라도 띄워줘야지!’ 망할 노던 라이츠 빌리지에서 조식을 먹고 로마니에미로 가는 버스를 탔다. 여전히 조식은 별로였고 아무리 우리가 늦게 갔다 쳐도 조식에 커피가 동나는 데가 어디있냐.. 아무튼 엉망이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볼륨 막방이 시작했고 로마니에미로 가는 길에 쭉 들었다. 팀의 역사가 담긴 방송이었고 클로징이 특히 좋았다. 작년의 즐거웠던 기억이 많이 생각났다.


2. 4시간 동안이나 달리는 버스. 출발한 뒤 두시간 쯤 됐을 때 한 가족이 버스에 올랐고, 내가 앉은 자리가 예약한 자리라며 비켜달라고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앉은 자리를 보니 정말 무슨 스티커가 있었다. 어쩐지 그 자리가 넓더라.


아기를 데리고 탄 가족이었는데, 마지막 한시간 동안 아기가 내내 울었다. 내 바로 옆이어서 좀 힘들긴 했고, 육아의 힘듦은 만국 공통이구나 싶었다. 쩔쩔 매던 어머니. 애들은 어쩔 수 없지. 이어폰을 끼고 잠을 청하는데 몸은 덥고 짐칸에 올라가지 않는 가방은 무겁고 와중에 잠은 쏟아졌다. 도착지에 내리니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3. 예약해놓은 카페 코티 호스텔은 시내 근처였다. 호스텔 닷컴에서 사진으로 본 것보다 아늑했고 보안도 위치도 괜찮았다. 조식은 7시-9시 6유로 무료 사우나 타임도 1시간이지만 있었다.


가방을 놓자마자 혹시라도 오로라 투어를 돌 수 있을까 해서 밖으로 나섰다. 오는 길에 관광 엑스배너를 봤기 때문이다. 시내 한 가운데 있는 작은 오두막(?) 하우스 같은 곳이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우리의 행운토끼 주디를 만났다.


4. 주디는 그 오로라 투어 하우스 아르바이트 생인데 베트남에서 공부하러 이곳에 왔다고 한다. 주토피아의 주디? 하니까 그렇다며 자기가 너무 좋아하는 캐릭터라고 했다. 나도 엄청 좋아하는 캐릭터라고 얘기하며 디스카운트 니쥬를 깔았다.


동양인이어서인지 우리를 보자마자 반색하며 어디서 왔냐고 물었고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또 반가워하며 한국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봐서 부모님이 걱정할 정도라고 했다. 동생이 비엣젯 항공사에서 일한다고 하니까 더 반가워했다.


화장을 보고 한국 사람일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내 머리색을 보고 긴가민가 했다고 한다. 붉은 색은 익숙하지만 파워풀한 블루 같은 건 드물다고. 엄청 에너지가 좋은 자그마한 친구였고 우리에게 풀하우스가 너무 좋았다고 칭찬했다. 그래 나도 한 때 그 드라마 되게 좋아했었지... 맨날 양갈래 하고 말이야. 한국인들은 화장을 잘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보니까 진짜 리터럴리 민낯이었다.


공영방송 직원으로서 K뷰티에 대한 무한 신뢰를 공고히 해주어야겠다는 책임감과 그 오두방정이 왠지 귀여워서 그래 그럼 지금 6시 반이니 우리 밥 먹고 1시간 뒤에 메이크업 도구를 가져와서 화장을 해주겠다고 선언했다. 주디는 정말 기뻐했다. 해스버거에서 햄버거 밀을 먹고(여기서는 세트 아니라 밀이라고 하더라) 파우치를 가져왔다.


진짜 너무 깔깔 웃겼던 것이, 시간은 가는데 자꾸 사람들이 투어 신청하려고 오니까 주디가 클로즈드로 판넬을 바꿔버렸다. 너 이래도 돼? 하니까 괜찮다고 우리만의 파티를 즐기자며 ㅋㅋㅋ 아무튼 톤은 다르겠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선상에서 화장을 해줬고 진짜 맘에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주디는 우리를 껴안으며 너무 맘에 든다며 기뻐했다. 그러면서 5프로 디스카운트 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K뷰티의 대단함 그리고 진짜 북유럽에서 공부하는 베트남 토끼 주디로서의 발랄함이 귀여워서 한국에 돌아가면 한국 코스메틱을 부쳐주겠다고 했다. 주디는 누가보면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꽉 껴안았고 정말 주디로구나! 하고 귀여웠다. 만약 오로라를 보게되면 더 많이 챙겨 보내줘야지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5. 주디는 아마 오늘은 오로라를 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날이 그다지 흐리지 않고, 그래서 사진 찍어주는 사람도 따라간다고. 투어는 8시 반에 시작하고 주디가 권한 스노모빌 옵션도 신청했다. 결과적으로 잘 한 일이었다. 페이스북 아이디를 교환하고 빠이빠이. 뭔가 메시지가 왔는데 아직 와이파이 잡기 전이라 메신저 어플을 다운 못 받았다.


투어는 8시 반에 시작했고 모두를 태우고 어떤 건물로 가서 방한복과 부츠로 갈아입혔다. 갈아입은 뒤에는 랜턴 하나씩을 쥐어준 채 산으로 굽이굽이 올라갔다. “올라가면 이게 유일한 빛이에요.” 올라간 곳에는 아 뭐였지 칸토? 싼토? 별장 같은 오두막이 있었다. 그 곳에서 연어올린 빵, 갓 구운 소시지, 입담 좋은 가이드가 직접 담근 딸기차를 먹고 마셨다.


안 왔으면 어쨌을까 싶을 정도로 깊은 숲이었다. 세상에 태어나 가장 많은 별을 봤다. 천문대에 갔을 때 봤던 가짜 하늘이 찐이 되어 하늘에 떠 있었다. 가이드가 어떠냐고 물어서 별이 많네요(...) 라고 영어 한계적인 말을 했더니 별은 원래 많은데 가려서 안 보이는 거라고 했다. 맞는 말이지. 지금껏 이 많은 별들이 있다는 걸 체감 못 하고 살았었는데, 눈 앞에 이렇게나 많은 별들이 반짝이니 뭐랄까 정말 우주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지연이는 별똥별을 세 번이나 봤다고 했다.


한참 먹고 있는데 가이드가 오로라가 왔다고 나와보라고 소리쳤다. 다들 놀라서 소시지랑 빵을 집어던지고 밖으로 나가니 정말 하늘에 흰 줄이 있었다. 뭐야 저게 오로라야? 싶을 정도로 미세한 하늘이었지만 오로라는 오로라였다. 우리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사진으로 찍으니 신기하게도 푸른빛이 더 선명하게 잡혔다. 지연이 카메라가 잘 잡혀서 사람들이 자꾸 우리 걸로 찍어서 보내달라고 했다. 난 옆으로 피신했고 지연이는 그들의 찍사 노릇과 모르는 관광객들의 지메일 주소 2개를 수집했다.


그리고 나서는 주디가 추천한 스노모빌 투어가 시작됐다. 이번에는 그냥 스노모빌 뒤 썰매칸에 앉아서 도는 거였는데... 그리고 진짜 인생 경험 ㅠㅠ


내 인생에서 가장 달과 가까이 있었다. 내 왼쪽으로 반쯤 남은 달이 바로 옆에 떠 있었고 오른쪽 하늘에는 별들이 쏟아질듯 가득했다. 그리고 땅에는 하얀 눈이. 이발로에 온 뒤부터 내내 그랬지만 약간 비현실적인 느낌이었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둘러싸여 기분이 우주로 폭발하는 듯했다.


즐거웠던 모빌 체험이 끝나고는 별을 보며 눈밭에 누워있었다. 핫팩으로 엉뜨 만드는 것도 잊지 않았고. 내려오는 길에 지연이가 ‘여행 내내 매일 행복을 경신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염원하던 오로라를 결국 봤다는 것도 좋았지만, 그 뿐만은 아니었고 오로라와 달과 별 그 아래 누워서 하늘을 보던 그 순간이 너무 완벽했다. 추위에 덜덜 떨던 것까지. 빛과 소금의 그대에게 띄우는 편지를 여러번 반복해 들었다. 몸은 너무 추운데 순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과 기분을 잊어버릴까봐 보고 있어도 벌써 그리웠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우연히 발견한 행운으로 결국 마지막 아쉬움을 풀었다. 이제 마음 좋게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행운의 주디. 5프로 디스카운트의 주디. 그래서 지금 몸은 찌뿌드드 그저그런 호스텔의 이층침대 위지만, 아래층에서 강지연이 자꾸 침대를 흔들어 짜증이 좀 나지만 그래도 기분 좋다.


근데 역시 호텔이 좋다는 생각 안 할수는 없다. 한 글자 차이일 뿐인데... 사람들 깰까봐 조심조심 다니고 불도 못 켜고 소금쟁이처럼 이동하는 것 슬프다 ㅠㅠ 하지만 이제 호스텔만 남았으니 적응해야 한다. 어깨가 너무 아파온다. 벌써 새벽 세시 반. 이제 자야지. 오로라 본 오늘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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