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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펀치 Jan 06. 2020

강펀치 in 이발로 (10)

완벽한 이발로의 마지막 밤?

완벽한 밤의 이데아가 있다면 오늘 거기에 닿았다. 어른 될 거면 감상 따윈 개나 줘버리자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같은 날은 감상을 꺼내지 않고서야 이런 완벽한 밤에 대한 모욕이므로 하루 정도 허용해주기로 한다. 예상했던 건 하나도 없었다. 그냥 산타마을에 가서 선배네 애기한테 산타 할아버지의 카드를 부치고 순록 고기나 좀 먹고 돌아오겠지 싶었는데. 정말 여러모로 잊지 못할 하루가 됐다.


아침에 일어나 호스텔 아래에 짐을 맡기고 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산타 빌리지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 출발까지 좀 기다리긴 했지만 막상 출발하니 금방이었고 그렇게 내린 산타빌리지는 거의 산타 기념품 테마파크였다.


북극권의 시작점, 아틱 서클이 잔뜩 쓰여있는 산타마을을 지연이와 함께 돌았다. 역시나 아가들이 많았고, 그 아가 중 한 명인 지연이는 온갖 기념품에 우와 우와 하며 구경을 했지만 나는 사실 뭐 심드렁했다. 자본주의에 굴복한 산타. 그래도 두리번 대다가 포스트 오피스를 찾았고, 2020년에 맞춰 편지를 보내준다는 우편 서비스를 신청했다. 언어를 선택할 수 있게 돼 있었는데 일본은 있는데 우리나라는 없어서 좀 서운하긴 했지만, 점원들이 친절해서 봐주기로 했다.


로마니에미는 북쪽답게 역시 눈이 가득 쌓여있었다. 추위에 떨다가 들어간 식당에서 레인디어 파스타와 레인디어 하우스 버거를 먹었다. 오로라 소울 칵테일도 한 잔 했다. 산타마을에서 루돌프에 오로라를 곁들여 먹고 마시니 마치 내가 굉장히 나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산타마을에 이딸라 마리메코 아울렛이라니 웃겼고, 그래도 꽤 즐거웠다. 오늘 날씨가 좋아서 달이 정말 선명하게 보였고, 새 눈도 마음껏 푹푹 밟을 수 있었으니까.


산타할아버지와의 사진은 패스했다. 다들 알잖아.. 고용된 직원일 뿐이라는 것을. 그 돈으로 햄버거나 하나 더 사 먹고 싶었다. 직접 보고 온 산타 할아버지는 자본주의에 굴복했다. 루돌프는 하우스 버거가 되고 선물은 마리메코와 이딸라 아울렛이 됐다..


이발로 마지막 밤은 공항 근처 숙소로 잡아놨던 터라 서둘러 움직여야 했다. 버스 시간이 또 4시간이라.. 3시쯤 내려와 버스를 타고 다시 카페 코티로 갔고, 20분이나 쩔쩔매며 걸어서 버스 스테이션을 찾았다. 가는 길이 조금 어려웠는데, 지도 잘 보는 동생님이 앞장서서 날 끌고 갔다. 나는 지도를 잘 못 보는 사람이라 지도 잘 보는 사람의 섹시함을 알았다. 너무 멋있었어 아가야.


그리고 다시 4시간을 달려 이발로로 향하는 길. 갑자기 핸드폰에 다운 받아 둔 오로라 어플에서 알람이 왔다. “구름이 없다면 1시간 이내에 오로라를 볼 수 있을 거예요” 뭐지 갑자기? 조금 뒤에 창문 밖을 보니 세상에. 오로라가 떠 있었다. 며칠 동안 그렇게 찾아 헤매던 오로라가 아주 크게 떠 있었다. 버스 안에서라도 보니 다행이긴 한데, 좀 허무하기도 하고 울렁울렁 이상한 마음이었다. 그래 어제 내가 본 건 아주 작은 거였구나 저렇게 예쁠 줄이야. 운이 좋으면 숙소에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들떴고, 이발로 리버 캠핑 정류소에 도착해 내리자마자 뒤를 돌았다.


그리고 말을 잇지 못했다. 엄청난 오로라가 얼어붙은 강 위로 떠 있었다. 왼쪽 하늘엔 구름 한 점 없게 커다란 달이 있었고 점점이 박힌 별들 옆으로 푸른빛이 지나고 있었다. 본 순간 느꼈다. 그래 이게 찐이구나! 캐리어랑 가방을 집어던지고 강 위로 내려갔다. 너무 아름다워서 계속 바라보고 서 있었다. “얼른 숙소에 가방 두고 돌아와서 제대로 보자!” 그렇게 숙소에 가방을 두고 식당에서 샌드위치 하나씩을 사 먹은 뒤 다시 나왔다.


청록일까? 아니 좀 더 푸른빛의 다리 같은 구름이 빛처럼 하늘을 갈랐다가 사라졌다. 은하수 같기도 했다. 가끔은 위로 솟았다가 가끔은 숲을 건넜다. 견우와 직녀가 건너는 오작교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닥터 후에서 본 시간의 틈 같다는 생각도 했다. 아무도 없는 강 위에 동생과 둘이 앉아서 소머스비를 마셨다. 이 밤을 계속 기억할 수 있을까.


추워져서 지연이는 잠시 들어왔고, 나는 아쉬워 모닥불 옆에서 좀 더 밤을 기다렸다. 40분 정도 지났을까, 언뜻언뜻 보이던 하늘이 다시 열렸다. 푸른 길이 열렸고 빛이 그 사이로 건너왔다. 이전보다 조금 더 하얗고 분홍색을 띤 빛이었다. 이게 진짜 예뻤다. 흰색과 분홍색의 빛이 하늘을 가르며 푸른 길을 맴돌다 숲 위로 떨어졌다. 내가 살아생전 본 색깔 중 가장 아름다운 색이었다.


웨딩피치의 천사 리모네 님이 하늘에서 내려오며 열리는 길 같았다. 어떤 때는 달에서 빛이 시작되는 것처럼 보였고, 빛의 끝이 닿는 곳은 좀 더 아롱거리며 푸르게 변했다. 빛의 끝이 숲에 닿으면 나무들이 푸른색으로 빛났다. 너무너무 신비롭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뻗치기를 한 보람이 이거라면 그래 잠보다 따뜻함보다 가취가 있다 싶었다.


손끝 발끝이 아려와 일어나 숙소로 향하는 길에도 아쉬워서 자꾸 뒤를 보았다. 돌아볼 때마다 새로운 오로라가 생겼다 사라졌다. 좀 허무하기도 했다. 며칠 동안 그렇게 한 번 보려고 애를 태웠는데 이렇게 한 번에 쏟아내려 주다니. 그래도 이렇게나마 여행을 마무리해줄 수 있게 해 준 게 고마웠다. 소원도 다시 빌었다. 좀 벅찼다.


완벽한 밤의 이데아가 있다면 오늘은 거기에 닿았다. 모든 게 완벽한 여행이었고 군용 핫팩과 슬리퍼를 안 가져온 것만 빼면 모든 게 완벽한 밤이었다. 눈 위에 누워서 계속 생각했다. 군용 핫팩이 있었더라면... 좀 더 오래 버텼을 것이다. 어쨌든 이번 여행은 하늘이 내려준 최고의 30대 축하 파티였다. 잘 살라는 의미로 받아들일게요.


카메라도 좋지 않고, 사진으론 순간의 아름다움을 다 담을 도리가 없어서 글로 남기지만 어디까지 담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럴 때는 정말 글을 잘 쓰고 싶다. 마지막 밤에 본 눈은 예전에 어느 글에서 읽은 대로 다이아몬드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오늘 날씨가 추워서 더 그런가 봐. 밟지 않은 새 눈들이 정말 보석처럼 사방에서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이발로에서의 마지막 밤, 너무너무 고마운 밤, 감성충 지대로 내린 오늘 밤. 숙소는 비좁고 단체 손님 때문에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샤워를 하루 더 못하게 될 수 있는 구질한 상황이지만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다. 내일 비행기만 놓치지 말아야지. 너무 고마운 기억만 남기고 가는, 핀란드에서의 마지막 밤.


이라고 써놓고 밤 산책을 한번 더 하고 들어왔는데.


진짜 왓더 헬 숙소 전기가 나가버렸다. 이발로 공항 근처인 이 숙소는 동생이 잡은 곳이었는데 방은 별로였지만 일단 호스텔이 아니고, 게다가 오로라를 실컷 보게 돼서 "너무 잘 잡았다 네 덕에 오로라를 봤네 역시 훌륭해"라고 말한 지 1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전기가 끊긴 것이다. 무려 새벽 2시에.. 불이야 없어도 자면 그만인데 히터가 문제라 리셉션으로 달려갔고 거기 계신 직원 분은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양초를 주려고 했다.... 아니 불이 문제가 아니라 추운 게 문제라고요. 다른 방은 없냐 물으니 키를 줬고, 가보니 그 방 문은 꼭 닫혀 열쇠로도 열리지가 않았다는 슬픈 전설..


결국 포기하기로 했다. 새벽 6시에는 깨야해서 자봤자 4시간인데 그냥 자자. 지연이는 후기에 다 남기겠다며 이를 갈았다. 얼어 죽지 않기 위해 핫팩을 그대로 착용하고 패딩까지 입고 누웠다. 내가 아래 침대를 쓰기로 했었는데 동생이 무섭다고 같이 자자고 했다.


그렇게 작은 싱글베드에 동생과 내가 패딩을 입고 나란히 누워서 잠을 청하는데 갑자기 모든 상황이 너무 웃겼고 우리는 미친 듯이 웃었다. 분명히 비즈니스 타고 와서 힐튼에 묵고 이글루 방에서 잤던 우리인데 마지막 날 이틀 못 감은 머리로 후진 방 싱글베드에 패딩까지 껴 입고 누워있다니. 눈을 감으니 정말 암막 커튼을 친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너무 웃겨서 깔깔대고 웃다가 잠이 들었다.


그리고 한쪽 코가 막혀서 일어난 새벽 7시. 예상보다 1시간 늦게 일어나 부산하게 준비를 마치고 체크아웃하러 밖으로 향하는데.. 세상에 리셉션이 잠겨있었다. 우리 택시 타야 하는데.. 완전 도로 한가운데에 주유소 옆 숙소사 다니는 차들도 많이 없고 알다시피 우리 유심은 전화도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망했다. 일단 지나가는 차를 잡아서 태워달라고 하거나 콜이라도 불러달라고 해야겠다 싶어서 도로에 와서 방방 뛰었다. 지연이는 이때 등 뒤로 식은땀이 쭉 났다고 했다.


한 차를 그냥 보내고 한참 있다가 그다음 차가 오는 게 보였다. 마구 손을 흔들며 나 좀 봐줘! 외치는데 웬걸 그 차가 저쪽에서 우리 숙소 앞으로 차를 돌아 들어오는 게 아닌가? 뭐지 싶어서 얼른 달려가 봤고, 택시였다! 심지어 사람도 태우지 않은! 열쇠를 우체통에 넣는 걸 보니 체크아웃한 손님이 열쇠를 두고 내려 부탁한 듯했고, 진짜 Thank god... ㅜㅜ 기사님은 우리를 태워줬고 그가 천사처럼 보였다. 나중에 이 시간을 동생과 얘기했는데 자기가 핀란드 여행 중 기적처럼 여기는 두 가지 순간이 있는데 하나는 버스 스테이션 찾으며 20분 동안 헤맬 때 한 아저씨가 길 알려줬던 것이고 두 번째는 이 때라고 했다.


그렇게 너무 다행히도 우리는 택시를 탔고, 이발로 공항에 도착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4시간 동안 정말 떡실신했다.


헬싱키로 돌아와서는 시내로 나와 선배한테 핀란드 (느낌이라도 나는) 입욕제 선물을 위해 러쉬를 방문하고, 타바스티아 옆에서 발견한 레코드 샵에서 바이닐 쇼핑을 했다. 지금 몇 개 들어봤는데 이번에 진짜 잘 골랐어!! 늘 여행 가서 레코드샵을 찾아 바이닐 쇼핑을 하는 게 규칙 같은 것인데, 그 규칙 중 하나인 가게 주인에게 추천받기 신공이 이번에도 통했다. 핀란드 뮤지션 추천해달라고 했고 사이키델릭 락 그룹이라고 한 팀을 추천받았다. 커버를 보니 Kingston Wall이라는 팀 같다. 매우 매우 성공적이었다. 저기 참 좋은 음악 많은 것 같아. 추천합니다. 상호명은 기억이 안 나지만.


그리고 남은 돈으로 껌을 사고, 면세점에서 슐 쇼핑을 마친 뒤 집에 오는 비행기를 탔다. 2019 글라스토 하이라이트를 봤고, 말레피센트를 봤고, 셸든 스핀오프 드라마를 조금 보다가 내렸다. 나머지 시간에는 역시 떡실신.


30대 목표를 뭘로 해야 할까. 무슨 버킷 같은 걸 만들까 10가지 정도를 써 붙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그냥 단순하고 중요하게 가기로 했다. 건강하게 무리하자. 무리 안 하는 삶을 사는 것은 싫고, 그러다 보면 아프게 되니 운동을 하고 체력을 기르면 안 될 일도 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그냥 30대 때에는 이대로 더 건강해지기로 했다. 달님한테도 그렇게 빌었다. 건강하게 무리해도 안전하게 해 주세요.


이로써 나의 20대를 닫는 30대를 여는 마지막과 첫 여행이 공식적으로 끝이 났고, 북극의 산타에게 받은 선물 같은 여행이었다. 한동안 눈 사진만 잔뜩 보며 살 것 같지만 그래도 너무 잘 놀아서 이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외출 다녀온 동안 집 와이파이가 먹통이 됐는지 아까 자는 동안 누가 왔다 갔는데 기억이 안 난다. 와이파이 고쳐주는 분이었던 거 같은데.. 아무튼 이제는 아까 먹다 남은 떡볶이와 함께 내일 출근 준비를 해야 한다. 아웅 몸 뻐근해.


내 생애 최고의 여행을 했다. 핀란드 사랑해 ㅜㅠ 이발로 사랑해 ㅜㅠ 꼭 다시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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