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함 Jun 20. 2019

짝사랑을 권함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짝사랑이라고 느껴질 때가 많다.

나만 놓으면 놓아질 것들을, 되돌려받을 기약 없이 사랑하는 듯한 느낌에 지친 그대들에게


그럼에도 짝사랑을 권함.







취미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당당히 그림그리기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그림에 소질은 없다. 미술에 대한 감각도 매우 부족하며, 나만의 매력있는 그림체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앉아서 연필을 들고 그린다. 아무것도 없던 종이위에 오로지 나만의 손짓으로 무언가가 만들어진다. 작지만 모든 선 하나하나가 나로부터 나온 것들이다. 그 느낌이 좋았다. 그렇게 큰 비용을 드는것도 아니지만, 누군가를 생각하고 그리면 그 자체로 의미있는 선물이 되는 것도 좋았다. 그런 나를 보고 잘한다, 재능있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난 재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릴 뿐이다. 꾸준히 그려서 쌓인 결과물들이 있을 뿐이다. 재능이 많아도 그리지 않으면 없는것과 마찬가지인것처럼 말이다.


그림 그리기도 나의 오래된 짝사랑이었다. 어렸을 때 엄마는 집에서 많은 것을 하셨다. 나를 돌보고 집안일을 관리하는 것 외에도 일거리가 많았다. 부업으로 불리는 것들이었다. 언젠가 엄마는 그림을 그리고 색칠하는 부업도 하셨는데,  노란 트위치를 포스터 물감으로 쓱쓱 그려냈다. 아무것도 없는 도화지위에서 귀여운 캐릭터가 나타나는 과정을 보며 마술 같다고도 생각했다. 옆에서 보며 어설프게 따라한적도 있지만, 대부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엄마 손크기와 비슷해지면 그림도 비슷해지진 않을까하고 생각했다.하지만 제법 손이 자랐을때도 내 그림은 여전히 그림보단 낙서에 가까웠다.


미술시간에 오랫동안 고민하며 떨리는 손으로 그렸던 내 결과물이 비록 마음에 썩 들진 않았어도, 내가 만들어낸 것이라는 애착은 있었다. 하지만 그 옆에 적힌 d나 c 모양의 알파벳은 그런 애착마저 앗아가곤 했다.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국영수 위주의 대입준비를 하는 학생들에게 미술시간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가끔 풀기싫은 문제를 앞에두고 의식의 흐름대로 펜을 움직인 것을 제외하고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려봤자 d와 c의 알파벳에 갇힐게 분명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험의 연속인 삶을 졸업과 함께 끝내고 나니 누군가의 평가를 받을 필요도, 철저한 준비도, 비싼 재료 없이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졌다. 그저 내가 원하는 대로 아무때나 아무곳에서 '취미'라는 이름으로 그림을 그리면 되는 것이었다. 그림에 대한 짝사랑을 흰 도화지 위에서 마음껏 펼쳤다. 보고 즐거워하거나 기뻐하는 사람들을 보며 때론 그 사랑을 돌려받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여전히 내 그림은 발전이 없고, 공감각도 비율에 대한 감각도 부족하여 어딘가 엉성하며, 닮고 싶은 그림체를 발견하여 따라하다보면 좌절할 때가 더 많지만, 그래서 변함없이 짝사랑이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그린다. 적어도 한켠에 쌓인 그림들과 약간의 뿌듯함이 남는 사랑이니 짝사랑 치곤 괜찮은 편이라고 생각하면서.





사람에 대한 짝사랑도 있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의 관심을 짝사랑했다. 조용한 관종이라고 해야하나, 조용하면서 관심을 갈구했다. 처음 만난 사람과 어울리는것을 무척이나 어려워했기에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부러웠다. 그런 성격, 흔히 말하는 외향적 성격을 짝사랑했다. 하지만 애써 노력하며 따라할수도 없을만큼 소심했다. 그러나 잘 아는 사람들이나 혹은 그리 많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나름 성격이 활발한 쪽에 가까웠다. 말하기도 좋아했고, 재밌게 말한다는 소리도 자주 들었다. 친하지 않은 사람들 틈 속에서는 여전히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조용한 성격이신가봐요?' 라고 누군가가 물어오면 주춤 고민을 하게 된다. 조용한 성격이 맘에 들지 않는게 아니다. 다만 매순간 조용한 성격은 아닌데, 그 말에 '네'라고 대답하면 언제 어디서나 내 성격은 '조용함'으로 결론 나는것 같아 맘에 들지 않았다.  


요즘도 가끔 어디서나 활발하고 활달한 성격을 짝사랑 한다. 누구와도 잘 어울리고 항상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 어떤 성격을 짝사랑한다. 인정의 욕구, 소속의 욕구, 애정의 욕구를 지닌 인간이라면 당연한 부러움인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이끌림일 수도. 그렇다고 해서 내 성격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나의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을 보면 내 성격을 사랑해 마지할 수 밖에 없다. 문득 문득 나와 반대되는 성격을 짝사랑 하기도 하겠지만, 완벽할 수 없음에도 완벽을 바라는 사람이 갖는 필연적인 짝사랑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정말로 누군가를 짝사랑한 적도 많다. 나의 애달프고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감정이 상대방에게는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매우 슬프고 괴로운 일이다. 짝사랑을 끝내면서 다시는 혼자만의 사랑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도 했었다. 짝사랑이 남긴 것은 작고 초라해진 내 모습, 잊어버린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법, 눈물로 지새우던 밤들 뿐이라고 생각했다.


내 사랑은 한번도 사랑이 된 적 없이 짝사랑으로 시작해서 짝사랑으로 끝나는 것이 가끔은 너무 억울하고 서러웠다.


하지만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먼저 상대방을 사랑하는 짝사랑을 시작해야 한다. 한 쪽으로 기울어진 무거운 마음을 지탱할 뿐만 아니라, 먼저 다가서는 용기도 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기울어진 시소가 점차 균형이 맞춰지면 짝사랑에서 짝은 떨어져나간다.


돌아보면 그런 과정이 있었기에, 지금 내 사랑은, 내가 느끼는 행복감은 훨씬 크다. 여전히 짝사랑이라는 단어를 보기만해도 그때의 내 모습이 떠올라 가슴 한켠이 아려오기도 한다. 되돌려받은 적 없이, 어쩌면 바란적도 없이 누군가를 온몸을 다해 사랑한 내 모습이 가슴 아프기도 하지만 그렇게까지 사랑했던 내 모습이 너무 소중하기도 해서 뭉클해진다. 더 큰 사랑으로 되돌려받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그래서 열심히, 열렬히 사랑했던 내가 너무 사랑스럽다고 이젠 말할 수 있다.


누군를 향한 짝사랑은 짝일지 몰라도, 그 사랑 자체는 어떤 사랑보다 온전하고 완전하고 사랑스럽다. 함께 마주하지도, 사랑을 속삭이지도, 사랑을 받지도 못한다. 대신 그 자리를 그리움이나 슬픔과 같은아린 마음들로 꽉꽉 채운다. 그럼에도 사랑은 멈춘적 없다. 이것만큼 사랑같은 사랑은 없다.


그래서 짝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아니 누구보다 열렬히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딱 그만큼보다 +2인 사랑으로 돌려받게 될거라 믿는다. 그럴 자격이 있으니깐 말이다.

 


누구보다 큰 사랑으로 되돌려 받기 위한 과정으로, 짝사랑을 권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