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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의서점 Oct 17. 2016

밤의 서점에서 보낸 한 달

- 밤의 서점 점장이 된 지 한 달이 지나다-

 밤의 서점 점장이 된 지 한 달 하고도 십 칠일이 지났다. 서점에서 보낸 한 달간 잊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어릴 적 방구석에서 딱따구리 그레이트 북스 전집을 열심히 읽던 어린이도 생각이 났고, 여름 방학 때 외가에서 다들 개구리 잡고 물장구치고 놀 때 홀로 세로줄에 곰팡이 냄새나는 세계 문학 전집을 탐독한 기억도 떠올랐다. 그때 브론테 자매들, 미우라 아야꼬,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헤밍웨이 등등 닥치는 대로 읽었다. 고작 초등학생이 뭘 얼마나 이해했겠냐마는 당시엔 조금 활자중독이어서 그냥 와구와구 읽었다. 그 책들의 교훈은 어른들의 세계는 뭐 이런 복잡한 감정으로 이루어졌구나 였다. 예컨대 물고기 잡으러 갔다 온 노인이 할 수 있는 말이 책 한 권이 되는구나 하며 감탄했던 것 같다. 그냥 '물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갔다 결국은 빈손으로 돌아왔다'라고 한 줄로 쓸 수 있는 글인데 참 할 말도 많구나 그런. 물론, 모든 어른이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을 어른이 된 나는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어른'이란 '어떤 사건에 대해 끝도 없이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외가에서 책을 발견하는 그 기쁨은 책장에 있던 19금 도서를 꺼내 보던 어느 날, 외삼촌에게 걸려 무참하게 혼나며 끝장이 나고야 말았는데, 그 책의 제목은 무려 '걸레스님 중광'이었다. 생각해보니 차탈레 부인의 사랑 이런 것들도 있었는데 왠지 도입부가 찝찝해서 안 읽었던 기억이 난다. 여튼 걸레스님 중광을 읽으면서도 교훈은 있었다. 아, 어른이란 뭔가 더러운 일도 서슴없이 하는구나. 멋지다! 하는. 

 고등학교 때는 야간 자율학습이 하기 싫어 학교에 있는 잠겨진 책장에서 먼지가 풀풀 나는 오래된 책을 몰래 꺼내 읽었는데 그 책들이 너무나 재미있어서 학교에 다니는 맛이 있었다. 그 책 중 '아이들만이 알고 있다'는 일찌감치 내 인생의 책이 될 만큼 감명 깊었는데, 원제가 To kill a mocking bird(앵무새 죽이기)라는 것을 커서 알게 되었다. (그때 훔쳐 마시는 물이 더 달다 는 인생의 진리를 일찌감치 깨닫게 되었다.)


 서점에 자주 방문하는 어떤 분은 '책을 만난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오프라인에서 구매한다'고 하였다. 나도 서점을 하게 되면서 내가 책을 만났던 순간들이 새록새록 기억이 났다. 거기에는 미운 오리 새끼를 읽고 어이없게도 목놓아 울던 다섯 살의 나도 있다. 미운 오리 새끼가 불쌍한 게 아니고 백조가 된 것이 감격스러운 것도 아니고 백조가 되니 영영 오리가족들과 떨어져야 되는데 그게 너무 서러웠던 것 같다. 역시 책은 열심히 오독하고 상상하라고 있는 것이다. 마음대로 읽고 아무하고도 이야기를 하지 않아 현재의 다소 산만한 정신 체계가 만들어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지라도 말이다. 어쨌든 오독은 좋은 것이다. 사실, 오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있을까? 그냥 맘 가는 대로 읽으면 되는 것이다.


 손님이 안 오면 서점이 다 내 것 같아 좋고, 손님이 오면 책이 팔리니까 좋고 다다 좋다. 책도 직원가로 맘껏 읽을 수 있어서 좋다. 그러나 언제까지 마음의 양식만 먹을 수는 없지. 현실적인 문제는 당연히 남는다. 한 달 결산 후 밤의 점장과 회전 초밥집에서 초밥을 먹으며 다음 달에는 초밥보다 맛있는 것을 먹자고 다짐했다. (다음 달에는 참치 집에서 룸을 잡고 제일 비싼 참치 뱃살을 먹었으면 좋겠습니다.. 밤의 점장님) 십몇 년 동안 종사한 생업이 남이 만든 물건이나 브랜드를 파는 것이었는데 밤의 서점이라는 나의 브랜드가 생기니 가슴이 대책 없이 뛴다. 그리고 남의 물건을 그렇게 팔아왔으면서 밤의 서점의 책을 파는 일을 잘 못하면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도 드는데... 앞으로 밤의 서점에서 책을 더 많이 팔아볼 궁리를 하고 있다. 어쨌든.

 밤의 서점 점장이 되고 나서 가장 큰 기쁨은 책을 꽤나 좋아했던 시절의 나를 기억하게 된 것이다.  언제부터인가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지 않았던 것 같다. 슬프거나 괴로운 기억이 아니었는데도 애써 지워버렸다.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른이 된 나는 스스로를 외면하고 있었다. 친구들에게 어떻게 다가가는지 알 수가 없어 방구석에서 줄구장창 책만 읽었던 어린이, 그래서 책에서 친구들을 찾고 기뻐하던 어린이를 말이다.  

 독서라는 것이 자폐적인 일이지만, 우리는 같은 책을 읽는 사람들과 느낌의 연대를 이루게 된다. 우리 모두는 고독한 개인이지만 어딘가에 같은 책을 읽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신기하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비록 그 책을 좋아하는 이유가 제각각일지라도 말이다. 서로 말을 걸지 않더라도 아는 척하지 않더라도 밤의 서점에 오는 사람들이 책을 통해 마음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물론, 이것은 낯가림을 하는 폭풍의 점장의 변명 인지도 모른다. 점장이 살갑게 보이지 않더라도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라는. 지금은 부족하지만 조금 더 지나면 밤의 서점에 딱 알맞은 애티튜드를 몸에 익히게 되겠지요. 기다려 주시라는.

(밤의 서점에 방문해 주시고 좋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많이 와 주세요 :)

- by 폭풍의 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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