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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의서점 Nov 21. 2016

이토록 절절한 생존의 기록

-  수 클리볼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를 읽고

 올여름 나는 서점 주인이 되었고 이전과는 다른 관점에서 책을 읽게 되었는데, 독서 후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서점의 이름을 걸고 추천해도 될 책인가?'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는 그런 기준에 차고도 넘친다. 나는 이 책을 2016년 최고의 책으로 뽑는다. 재미로만 따지자면 다른 책들도 많았지만 내게 이 책은 압도적인 독서 경험으로 남았다.  

 처음 신간 소개를 보았을 때는 평소 관심사인 '뇌 건강'이라는 단어에서 흥미를 느꼈다. 인풋과 아웃풋이 다른 인간에 대한 탐구이니까. 물론, 인간이란 설명되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이해되어야 할 존재라는 말에 깊이 동의한다. (나는 이 문구를 한 정신분석학자가 쓴 책에서 읽었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기 전 나의 흥미를 자극했던 것은 어떤 신경물질이 이런 돌연변이-평범한 가정에서 제대로 양육되었음에도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를 만들어냈을까?라는 심리학 관심자의 궁금함이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으며 어떤 형태로든 이 값진 독서에 감사를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깊은 감동에도 불구하고 서평을 쓰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는데, 그 이유는 이 책이 가진 진실함을 적절히 표현할 언어를 쉽게 찾을 능력이 내게는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육아 실패담? 콜럼바인 총기난사 사건의 후일담? 폭력 성향이 어떻게 생성되는가에 대한 분석? 다 맞지만 나는 이 책이 '생존기'라고 생각한다. 무인도에 떨어져 살아난 생존기, 난파된 선박에서 살아난 생존기,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세상에서 가장 참혹한 방식으로 실연을 당한 여인의 생존기.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이별을 선언했다. 잠깐 만난 사이도 아니고 태어난 순간부터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던 사람이 말이다. 그리고 그는 그녀 곁을 떠나 어디에 간 것이 아니라 영영 사라졌다. 게다가 용인될 수 없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자살했다. 설상가상으로 그 범죄의 원인이 실연당한 그녀의 잘못으로 돌려진다면, 그녀의 마음은 어떨까? 우리는 유사한 상황-상처 입은 존재인데 그 상처의 원인이 자신임이 판명된- 에 놓인 인물들을 알고 있다. 오이디푸스는 눈을 찔렀고 오대수는 혀를 잘랐다. 수 클리볼드는 다른 선택을 한다. 영원한 고통을 택한 것이다. 그녀는 '가슴이 찢어진다는 말이 비유가 아니라 묘사'임을 느낄 정도의 고통을 피하지 않고 마주한다. 그리고 서문의 제목처럼 '알 수 없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바친 16년'의 시간을 보낸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는 그 고통의 기록이다.

 

 서점 손님들에게 이 책을 권하면 관심은 있으나 대부분 부담스러워한다. 나 또한 그랬다. 선뜻 이 책을 읽기가 쉽지 않았다. 너무 어둡고 심각한 내용일 것이라 아무래도 꺼려졌던 것이다. '고통의 기록'이라니 그 고통에 참여하는 독자들에게 너무 힘든 경험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 읽고 보니 오히려 위안이 되는 책이다. 그것은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을 보고 상대적으로 느끼는 안도감 같은 종류의 감정이 아니다. 수 클리볼드는 이 생존기를 자기 연민에 빠진 신파극으로 만들지 않는다. 감정의 과장도 의연한 척도 하지 않으며, 아플 때 아프다고 말하지만 고래고래 소리 지르거나 울지 않는다. 대신 집요하게 성찰해낸다. 그 과정을 보면서 인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참으로 연약하지만 동시에 강한, 인간이라는 경이로운 존재에 대해.  

 

 자신에게 버거운 사건 앞에 사람들은 성급히 원인을 찾아낸다. 예컨대, 죽도록 사랑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사랑이 식었다고 이별을 고한다면, 그는 사랑하던 그 사람의 변심을 탓할 수 없다.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그는 시간에 혐의를 씌운다. 시간이 그들의 사랑을 식게 했다고. 그는 자신의 사랑을 보내기를 거부하고 이별의 원인이 된 시간에 복수하기 위해 헛된 계획을 세울지도 모른다. 그의 생각 속에서 그들의 사랑의 전말은 다른 이야기로 박제된다. (죽도록 사랑한 연인의 부재는 곧 나의 죽음이므로 살기 위해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주인공 파이는 난파한 배에서의 참혹한 상황을 견뎌내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육이 난무한 배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쯤 되면 진실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다. 우선 살아남아야 하니까. 그리고 푸른 기와집에 사는 분. 이 분 또한  부모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 사건 앞에 충분히 죽음의 원인을 성찰하지 못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된 것인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강한 의지만이 남았을 뿐이고 그리하여 대통령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갈 방법은 그 길 밖에 없으니까. 그녀는 푸른 기와집에서 떠나 있는 동안 필사적으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 같다. 물론 주변의 샤먼들이 진실을 가린 것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제대로 된 애도에는 성찰할 수 있는 지적 능력도 그것을 끝까지 밀고나갈 의지도 필요하다. 여기에 수 클리볼드의 대단함이 있다. 그녀는 삶의 끈을 놓지도, 자신을 속이지도 않는다. 마치 희귀병에 걸린 의사가 자신의 몸을 마취도 없이 하나하나 해부하는 것 같이 그녀는 그 모든 고통을 감내하며 문제의 원인을 규명한다. 그는 그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처럼 아무 바램도 욕망도 버리고 오직 진실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나는 그녀의 사진을 신문기사에서 봤다. 하얗게 샌 단발머리, 뼈에 가죽만 남아있는 노년의 여인이었다. 그녀의 사진을 보고 이 단어들이 생각났다. '재', '탄식' 그리고 '죽은 엄마'. 나희덕 시인의 <허공 한 줌>이란 시에는 죽은 엄마 이야기가 나온다. 엄마가 깜빡 잠든 사이 아기가 난간에 서 있는 것을 본 엄마는 허공으로 몸을 날리고 순간 엄마는 순간 숨이 멎는다. 아기는 다행히 난간 안쪽으로 떨어져 울고, 그 소리에 죽은 엄마는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달려간다. 병원에 다녀온 엄마는 아기를 아랫목에 누이고 토닥거리며 재운다. 아기가 잠들자 죽은 엄마는 그제야 마음 놓고 죽는다.

 콜롬바인 사건이 일어나던 날 이미 죽었던 수 클리볼드는 이 긴 애도의 과정을 거치면서 마음 놓고 죽을 수 있었을까?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 죽음의 끝에서 자신이 살아가야 할 의미를 붙든다. 아들 딜런이 우울증과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이 이 사건의 원인이었다는 것을 규명해내었다. 그리고 자신의 아픈 실패담을 글로 써 내려갔으며 이런 비극을 막기 위해 자살방지 협회 등의 공익적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이 책을 부모가 된 사람만 읽으면 많은 부분 놓치는 것이다. 우리모두는 이 절절한 생존의 기록을 통해 위로를 받는다. 슬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철저하게 규명되어 스스로에게 이해된 슬픔은 그 슬픔과 함께 살아가도록 숨통을 틔워준다.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겪고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 살아 있으나 죽은 것 같은 사람들, 슬픔을 억누르며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권한다. 이 책은 그런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러니까 살아가라고.  살아야 꽃이든 열매든 맺을 수 있다고. (by폭풍의 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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