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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미림 Aug 21. 2020

유학? 신나게 놀아봄세!

영국 유학 생활 즐기기

유학 생활 내내 학교에 진을 치고 공부만 했다더니 신나게 놀라고? 물론, 주중엔 학교에 최대한 짱 박혀 열공 모드를 유지해야 한다. 다음날 학업에 지장이 없도록 술도 자재하고, 각종 질병을 피해 몸도 관리하며, 식단 조절과 함께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해야 한다. 당시 내가 정한 금기 사항엔 연애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금요일 밤이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여긴 런던이다! 런던에 얼마나 놀거리가 많은가. 주말이면 클럽 한 귀퉁이에서 두둥실 리듬에 몸을 맡기고, 박물관이나 전시장에서 교양 있는 척 작품 앞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빠져본다. 한 손엔 사진기를 들고 런던 구석구석 관광지를 돌아다니며 여행자 모드를 즐겨야 한다.



외국인 친구 사귀기


인터넷 검색을 하다 미트업이라는 모임을 처음 알게 되었다. 주제를 정해 맘에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이런저런 정보를 공유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식이었는데, 당시 한국 문화를 좋아하는 영국인들의 모임에 종종 참여했었다. 주목적은 언어 교환이었고, 처음 만나 한 시간은 한국말로만 다른 한 시간은 영어로만 대화를 하고, 그 이후는 섞어서 말해도 무방 했다. 보통 한국말로 말하는 시간에는 한국인들이 리드하며 한국말을 알려주는 식이었고, 영어로 말하는 시간에는 영국인들의 질문 공세가 이어졌다.


K-POP과 K-Drama가 유명해지기 전이었으나, 외국인들이 한국의 정치, 문화 및 역사에 관심이 그렇게 많을 줄 몰랐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교과서에서나 보던, 지금은 내 머릿속 희미한 기억 속에 묻힌 까마득한 내용들까지도 자세히 알고 있었다. 한국에서 교환 학생을 했거나 따로 어학당을 다닌 사람도 있었고, 영국 대학 한국어 학과를 다니는 학생들을 포함해 그야말로 한국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첫 모임에 참석 한 이후 난 매주 그 모임을 갔었고, 그때 만난 친구들에게 과제를 하며 궁금한 표현이 있으면 물어보거나, 그들이 써놓은 글이나 일기를 보면서 교정을 해주기도 했다. 한국어를 자세히 가르쳐 주고 싶었으나, 평생을 별다른 고민 없이 사용했던 터라, 막상 알려주려고 하니 문법 적인 부분이 너무 어려웠다. 그렇게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없어, 한국 사람으로서 글을 읽었을 때 어색한 부분만 고쳐주는 식이었다. 이 모임은 대학원 초반까지 나갔으나, 모임의 목적이 점점 변질되는 바람에 그만뒀다.




내 생애 두 번째 대학 생활 즐기기


같은 과 2학년에 한국인 남학생과 여학생이 한 명씩 있었다. 내가 도서관에서 한창 과제를 하고 있을 때, “저기, 한국인이시죠?” 하며 남자아이가 먼저 말을 걸었고, 서로 인사를 나누고 밥도 몇 번 먹었다. 패션 디자인과 2학년 학생들과도 함께 친해져 졸업 때까지 그 친구들과 주로 시간을 보냈다. 난 이미 사회생활을 하고 유학을 온터라 그들과 나이 차이가 좀 있었다. 그 친구들은 클럽을 좋아했고, 술자리에서는 항상 게임을 했으며, 어찌나 활발하고 활동 적인지, 앉았다가 일어났다, 뛰고 구르고를 반복했으며, 그들과 함께 게임을 하고 나면 난 녹초가 되기 일쑤였다.


우린 중국인 친구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때 묻지 않고, 영혼이 맑다는 표현이 딱 맞을 정도로 순수한 아이들이었는데, 이들 역시 어리고 활동 적이라 한국 대학에서 유행하던 게임에 쉽게 적응하며, 너무 신나 방방 뛰어다녔다. 12월 31일에다 같이 티브이 앞에 앉아 런던아이 앞에서 터지는 불꽃들을 보며 Happy New Year를 외쳤고, 주말이면 영국 근교로 기차 여행을 같이 다니며, 그 안에서도 쉴 새 없이 게임을 했었다. 한 번은 다 같이 이태리 식당에 갔는데, 접시 옆 작은 종지에 식초물이 담겨 있었다. '밥 먹기 전에 마시는 거다, 뭘 찍어 먹는 거다, 밥 먹기 전에 손을 씻는 물이다. 밥 먹은 후에 손을 씻는 물이다.' 등 다양한 의견으로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었다. 지금도 이태리 식당에서 해물 음식을 시키면 나오는 그 종짓 물을 보면 그때 생각이 나곤 한다. 


나와 가장 친한 남녀는 어느새 커플이 되었다. 남자아이는 나와 같은 외동에 어머니는 한국인, 아버지는 중국인이셨다. 어머니와 몇 번 통화도 했었는데, 자기 아들 잘 챙겨 줘서 고맙다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여자 아이의 아버님은 건축 쪽 대기업의 부장 이셨고, 우린 졸업하고 그 기업으로 지원하면 바로 뽑히지 않겠느냐며 놀리기도 했다. 비록 길지 않은 만남이었지만, 늦게 까지 술을 마실 때면 서로의 개인 적인 일까지 다 공유하는 막역한 사이가 되었었다. 대학 및 대학원 졸업 후 난 싱가포르로 갔고, 두 커플은 3학년 졸업 후 상하이에 위치한 회사에 취직하여 중국으로 떠났다. 영국에서의 잊지 못할 좋은 추억을 만들어 준 고마운 사람들이다.


영국에서의 잊지 못할 좋은 추억을 만들어 준 고마운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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