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깨진 창문 밑에 앉아있을래”
이자벨과 테오의 집에 방문한 메튜의 이야기로, 메튜의 시선으로 영화가 전개된다.
극적인 서사나 갈등은 없지만 생각할게 참 많은 영화다.
이 리뷰는 주로 영화 해석을 다루고 있으니, 선 관람 후 읽기를 바란다.
“이 영화는 내 유아적인 세계에 돌을 던졌다.”
21살에 처음 봤지만 이제야 내리는 한 줄 감상평.
다시 한번 봐도 미친 듯이 가슴이 뛰는 영화.
감상평을 쓰기 전에 내 이야기를 하자면
메튜와 이자벨, 테오처럼 딱 이 영화를 접했을 때 나는 혼자였다.
어머니의 어학연수가 끝나가던 시기였다.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마중 나가기 위해 출국하셨었고
함께 여행하기 위해 오랜 시간 집을 비우셨었다.
오빠는 입대하지 얼마 되지 않아서 휴가를 잘 나오지 못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 누구의 구속도 압력도 없을 때 나는 가차 없이 현실을 버렸다.
그러면 안 되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당시 편입 준비로 매일 6시면 가던 학원을 안 나가고
아침마다 전시회를 보러 전시관이나 미술관으로 출근했었다.
그렇게 한 달, 부모님이 돌아오셨을 때
나는 편입 포기 선언을 했고
휴학 중이던 학교를 다시 나가기 시작했다.
그 한 달간 인생에서 가장 많은 책을 읽고
인생에서 가장 많은 영화를 보고
사진을 찍고 생각을 또 생각을 반복했다.
전공이 법이었지만 2014년 12월 통진당 해산 사건이나
2016년 최순실 비선 실세는 부끄럽게도 알바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2차 세계대전이나 프랑스혁명에 빠져서
그 시대 철학자, 한나 아렌트, 미셸 푸코, 하이데거와 니체 책을 읽었다.
영화와 내 현실이 맞아떨어져 더 그랬을 수도 있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인데
내 현실은 왜 그랬을까,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이제 와서 회고해보면
몽상가들은 필연적으로 몽상의 시기를 살게 되고
그 현실에 돌을 던지는 무언가가 필요할 수도 있겠다.
에바 그린의 첫 등장 씬
메튜와 이자벨, 테오는 프랑스 누벨바그 운동에서 처음 만난다.
첫씬이 누벨바그였다는 점에서 가슴이 뛰기 충분했다.
누벨바그는 ‘기성세대’의 ‘보수적인’ 영화와 사회 상류층에 맞선 영화 혁명이다.
왜 굳이 누벨바그를 첫 장면으로 넣었을까,
당시 프랑스 사회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기 위한 장치가 아니었을까.
영화는 누벨바그로 시작해서 68 혁명으로 끝난다.
이자벨과 테오는 본인들의 세계에 메튜를 초대한다,
이 식사자리에서 메튜는 아버지의 말에 경청하지 않고
라이터와 식탁보가 만들어 내는 패턴에 집중하는데
이 장면 또한 몽상가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현실, 지금 하고 있는 대화와 동떨어진 생각과 대화
한편 이 식사자리에서 테오의 진보적, 혁명적인 생각이 드러난다.
이자벨과 테오 남매는 부모님이 여행을 떠났을 때 메튜를 초대한다.
이 셋은 영화를 흉내 내면서 영화 제목 맞추기 놀이를 하는데
틀렸을 때 벌칙은 성적 행위 (자위나 성행위)를 하는 것이다.
여기서 19금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나는 그 장면들이 야해 보이지 않았다.
영화를 영화로 보면 선정성이 강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특히 ‘몽상가들’의 수위 높은 장면들은 억지로 끼워 넣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놀이를 통해 항상 붙어있던 이자벨과 테오 남매는 분리되기 시작하는데,
이 과정에서 서로는 불안감을 느끼고 갈등이 나타난다.
나는 이자벨과 테오의 분리를 유아기적 시절에서의 탈피라고 생각했다.
번데기가 변태를 시작하며 성장하는 것처럼 그들은 하나에서
(태어날 때는 샴쌍둥이였다) 둘로 해체되어 간다.
굳이 그 과정에 성행위를 배치한 이유는
테오와 이자벨은 서로를 사랑하고 하나라고 느껴도
쌍둥이이기 때문에 근친의 악을 저지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성장과정에는 사랑과 성행위가
필연적일 수도 있는데 그들은 그것을 할 수 없다.
사랑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기에.
아마 이자벨과 메튜가 나누는 성관계가
이자벨과 테오의 분리를 가장 직관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총 대신 책을, 폭력 대신 문화를.”
내가 제일 좋아했던 장면.
한편 그들은 운동권 한가운데서 만난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젊은이라지만
현실감각을 잊고 집안에서 영화를 흉내 내고 예술에 대한 이야기 만을 반복한다.
당장 집 밖 길거리에서는 혁명의 시위가 계속되고 있는데.
아마 몽상가, 예술가, 학자, 위선자들을 비판하는 장면이 아니었을까.
사회적 인식이 있어서 부정부패로 가득 찬 세상을 비판할 수 있지만
소리를 내고 행동으로 보여줘야 세상이 바뀐다.
출판을 하던, 시위에 참여해서 촛불이라도 들고 있건, sns에 글을 쓰던
당장 그게 선인지 악인지 모르더라도 조금의 실천이 있어야 ‘국민 일인분’을 하는 것이다.
스테이크를 썰고 빈티지 와인을 마시며 본인들의 세상에서 아무리 고상하게 사회를 비판해봐야
당장 민주주의의 물결이 일고 있는데 지하실에서 예술가 흉내를 내면서
인간의 실존이 가장 중요하다며 철학 얘기만 해봐야
그들은 민주주의의 열매에 무임승차한 위선자 들일뿐이다.
셋이 목욕을 하는 장면 역시
이자벨과 테오 남매의 특별함을 보여준다..
본인이 인간이라면 결코 깰 수 없는 어떤 선도 보여주는 것 같다.
메튜는 이런 이자벨과 테오를 비판한다.
마지막에 이자벨은 부모님께 본인과 테오의 관계를 들켰다고 생각해
또다시 영화를 따라 하며 가스로 자살 시도를 한다.
이때 영화는 현실일 수 없는데
죽음까지도 영화를 따라 하는 이자벨의 유아적 모습이 연출된다.
이때, 집 밖에서 68 시위를 하던 군중들이 던진 돌에 창문이 깨지고
이자벨과 테오, 메튜는 길 밖으로 나가 시위에 참여하게 된다.
그때 비로소 이자벨과 테오는 알에서 벗어나 현실을 마주하게 된 것을 나타낸 게 아닐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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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알 수 없는 불안을 느끼고 일탈을 꿈꾸고 현실을 바꾸고 싶기도 하지만
그때는 언제가 될지 모른다.
그저 우리는 그때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하며 살뿐이다.
영화 중간중간에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 반드시 폭력이 필요한가?’
라는 논쟁이 펼쳐지거나 그러한 생각을 하게 만드는 암시적인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사실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 폭력이지만 (시위를 하는 측도, 시위를 진압하는 측 모두에게 /
+3.1 운동도 처음엔 만세운동이었지만 농촌으로 확대할수록 폭력시위가 되었다)
‘정말 해답이 폭력일 정도로 인간은 악한 존재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고.
영화 전반적으로 표현되는 색감이나 영상미도 너무 아름답다.
아무 생각 없이 정말 ‘미’ 그 자체를 감상해도 되고
연출이나 의도를 분석해가며 중간중간 영화를 멈추고 생각하며 봐도 좋을 영화.
마지막으로 그 시절, 사진과 예술에 빠져 현실을 살지 못했던 나
그러나 길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모든 사람들이 방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