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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브리데이미 May 02. 2022

함께 사는 사이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과 인간성을 지켜주는 기본값은 다르다. 수치적으로 계산되는 영양분과 누울 자리 정도면 한 사람의 목숨을 이어가기에 충분하다고 주장하는 쪽이 생존 가능성이라면 인간성은 인간 내면의 작동원리를 제대로 굴리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라고 항변한다.


 '인간다운 삶'을 위한 기본값에는 뭐가 있을까? 눈치 보지 않고 밥 먹을 수 있는 안정감, 폭력과 학대가 제거된 평화로운 환경, 욕심을 조금 더 부려보면 따뜻한 미소와 친절도 있을 것이고... 그중에는 아마 나의 속내를 원색적으로 풀어놓아도 좋은 1인분의 공간이라는 것도 있을 것이다. 사회적인 합의를 따르느라 억누른 속내가 원래의 생긴 대로 퍼질러 누울 수 있는 자리. 어떤 척이든 하지 않아도 되는 나만의 공간.


 이 구역의 평화와 자유를 포기하고 누군가와 사적인 공간을 공유하기로 했다는 건 엄청난 사랑의 힘이거나 자유와 평화에 지친 고독의 하소연이거나. 미친 충동 아니면 오랜 숙고에서 기인한 신중한 결정일 것이다.


 사적인 공간의 공유는  자아의 최대치를 할애해 그를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다. 시간이 늦으면 헤어질 손님 초대가 아니라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관계로 접어들겠다는 선언이자 영원히 함께하고 싶다는 소망을 몸소 보여주는 실천적인 고백이기도 하다.


 

 한 집에 살다 보면 서로의 존재를 모른 척하기 힘들 정도로 붙어 지내면서 상대의 단점까지 모른 척하기 힘들어진다. 자연스레 신비의 꺼풀이 허무하게 벗겨지고 자칫하면 밑바닥까지 드러내게 된다. 꼭 함께 살지 않아도 서로의 바닥을 볼 수 있기는 하나 그때의 바닥은 커피를 다 마시면 드러나는 컵의 밑바닥과도 같다. 동거 후에 알게 되는 바닥은 그 바닥이 아니다. 컵을 들고 고개를 숙여야  보이는, 컵의 진짜 바닥. 뒷면이다.


 어떤 사람의 밑바닥을 본 적이 있나.


 정말 실망스럽다. '역시. 메이드 인 차이나구나...'싶다. 메이드 인 차이나에서 만든 물건으로 둘러싸여 살면서도 막상 제조국을 눈으로 확인하면 어김없이 실망하는 것처럼. 완벽한 인간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막상 인간의 불완전성을 맞닥뜨리면 꼬박꼬박 실망한다. 인간을 사귀는 대가로 내야 하는 세금처럼 빠짐없이 부과된다.


 어떤 실망감은 관계를 종결시키지만 또 어떤 실망감은 관계를 입체적으로 구성하기도 한다.


 멀쩡한 앞면만 보여주는 사람에게는 느끼기 힘든, 내 뒷면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설명하기 힘든 서로에게 실망한 사람들만이 이를 수 있는 관계의 저편. 서로에 대해 엉뚱하게 기대하지도 불필요하게 실망하지도 않는 편안한 경지 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맹숭맹숭해 보일지 모르지만 바로 이 온도에 이르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실험을 관계의 목숨을 걸고 했던가.


 친밀감과 편안함을 시들해진 욕구를 위로하기 위한 면피용으로 쓰고 싶지는 않다. 포장용으로 에둘러 쓰기에는 아까운 말, 선물을 감싸는 포장지가 아니라 선물 그 자체에 가까운 말이다. 끈끈함이 해피엔딩을 보장하는 건 아니래도 웬만하면 이 끈끈함에 들러붙은 채로 평온한 동거의 결말을 맞이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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