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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브리데이미 May 12. 2022

국민과일을 싫어하는 국민

 오이나 당근도 아니고 사과를 싫어한다고 하면 '에엑?!'하고 놀라는 이들이 있다. 이 정도로 놀란 상대라면 인생에서 사과를 싫어하는 이를 처음 만난 경우일 가능성이 높다. 마치 강아지나 햇살을 싫어한다는 고백이라도 들은 냥 상처받은 표정을 짓는 상대 앞에서 나는 옅은 미안함이 들고는 한다. 누군가의 인생에서는 상큼한 재미요 비타민 가득한 힘이었을 텐데. 그걸 단칼에 부정하고 흠집 내며 실례를 범한 기분이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과일 가게에 쌓인 빨갛고 탐스러운 사과를 보면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지고는 했다. 사과를 씹을 때의 고통이 머릿속에 저절로 떠올라 버렸기 때문이다. 귤이나 딸기처럼 새콤달콤한데 무른 과일은 괜찮았다. 달지 않아도 아삭아삭한 오이나 고추도 좋아했다. 다만, 이 둘을 합한 사과만큼은 견디기 힘들었다. 한 입 베어 물면 단단한 덩어리가 치아와 맞서는 느낌으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어 불편한 식감 사이로 흘러나오는 새콤한 즙은 당에 둘러싸인 신맛이 본색을 드러내며 훅치고 들어오듯 날카로웠다. 흡사 입 안에서 작은 분쟁이라도 일어난 듯했다. 결국에는 보다 단단한 치아가 입 속의 방해꾼을 아작 내버리기는 했지만 그 시디신 싸움을 또 하고 싶지는 않았다. 흡입 전 중간단계에서 번거롭게 껍질을 벗겨서라도 먹어줘야 하는 건 대게나 새우이지 사과가 아니었다.


 이 은밀한 불호를 밖으로 내비칠 수 있게 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아무리 둘러봐도 사과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가족끼리 밥 먹고 나서도, 친구 집에 초대받아도, 친척 모임에서도. 가운데 씨앗 부분이 깔끔하게 잘린 반달 모양의 사과가 대접과 호의의 상징처럼 놓이고는 했다. 혹시 이 중에서 나처럼 싫어하는 사람이 있나 하고 주위를 살피면 다들 아무렇지 않게 포크로 사과를 찍어 자연스럽게 먹고 있었다.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나까지 아무렇지 않게 하나 콕 찍어 먹게 될 정도였다.


 심지어는 드라마 속에 등장한 가짜 가족들까지 깎아 놓은 사과를 중심으로 모여들고는 했다. 앞치마를 맨 엄마 역할의 배우가 과일 접시를 갖다 놓으면 나머지 가족들이 사과 한쪽을 든 채 자기 몫의 대화를 주고받는 게 90년대 가족 드라마의 전형적인 풍경이었다. 아삭아삭.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깎은 사과 하나로 그럴듯하게 연출되었다. 당시 일일드라마 속 가족들은 어쩐지 대한민국 전체 가족을 대표하는 표준적인 롤모델처럼 느껴졌는데 그런 그들이 식사 후 후식으로 사과를 먹는다면 응당 나 또한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국민과일을 싫어한다고 반기를 들 용기가 없었다. 논리적으로 보면 말이 안 되지만 사과를 싫어한다는 말은 꼭 가족의 화목에 초를 치는 것처럼 들렸다. 강아지나 햇살처럼 미운 구석을 찾아보기 힘든 보편적인 애찬의 대상인 사과란 '좋아해야 마땅한 것' 중의 하나로 여겨졌다. 그 완전무결한 좋음에 대해 어떤 결함을 찾고 비난하는 순간 혼자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릴 것 같은 사회적 불안감이 사과 접시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이 사회와 가정에 정상적으로 소속되었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용기를 내어 포크를 들었으나 결과는 언제나 한쪽 이상을 가지 못했다.


 

 사과는 먹는 과일을 넘어 문화코드 속에 자리한 굳건한 상징이기도 했다. 세잔은 '사과로 파리를 정복하겠다'며 수십 년간 사과를 그렸다. 몇천 년 된 성경과 신화 속에는 등장하는 단골 과일도 사과였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에 유혹당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아프로디테에게 바쳐진 황금사과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그래도 저 사과는 접시에 놓여 있지 않아 보기 편하다고. 안 먹고 읽기만 해도 되니 부담이 덜하다고 엉뚱하게 안도하고는 했다. 신화 속의 상징으로 묻히는 줄 알았던 사과는 핸드폰 로고로 새겨져 매해 새로 출시되기도 했는데 한 입만 먹고 놔둔 모양이 꼭 사과에 대한 내 마음 같아 희한한 포인트에서 애플에 정이 가기도 했다.


 사과의 맛을 알게 된 건 새로운 사람을 통해서였다. 그는 나에게 사과에 담긴 영양성분을 강조하지도, 예쁘게 깎아서 손에 억지로 쥐어주지도 않았다. 그저 내 배속에 들어앉아 매일 아침마다 한알씩 자발적으로 먹게 했다. 임신기간 내내 출근 전마다 깎지도 않은 사과를 씻어서 통째로 먹었다. 우적우적. 흡사 외국 영화 속의 주인공들이 주방 바스켓에 놓인 사과를 껍질 채 쿨하게 먹듯이 나도 사과 한 알을 손쉽게 씹어 삼켰다. 사과 껍질에 이를 꽂는 시작점 자체를 어려워하던 이전에 비하면 놀라운 변화였다. 아기를 통한 갓생이 아침마다 이어졌다. 집안 전체가 사과 향으로 시끌벅적했다. 두 귀와 입 안과 배 속이 사과 하나로 향긋하게 차올랐다. 사과보다 작은 아이가 사과만큼 커지고, 종내에는 사과보다 커진 채로 배 속에서 나오자 나의 입맛도 이전으로 돌아가 싹둑. 다시 사과와 멀어졌다. 본투비 사과 취향이던 아이는 태어나고 나서도 여전했다. 나의 본투비 와는 별개로 사과박스는 정기적으로 배달되었고 냉장고에는 사과 한 꾸러미가 상시 대기 중이었다.


 

 스스로는 잘 먹지도 않으면서 사과 잘 먹는 법을 아이에게 가르치는 뻔뻔한 부모가 되기도 했다. "아침에 먹는 사과는 금메달, 점심은 은메달, 저녁은 동메달"이라는 건강정보를 아이의 유머 취향에 맞게 바꿔 "아침에 먹는 사과가 금사과이고 저녁에 먹는 사과는 똥 사과이니 앞으로는 금사과를 더 많이 먹자"라고 말하자 아들은 자기는 똥 사과가 더 좋다며 키득거렸다. 초등학생용 개그를 저격했다는 만족감에 취한 나머지 똥 사과를 먹겠다는 똥강아지 같은 말에 나도 따라 웃고 말았다.


 그래도 한번 사과를 먹어 버릇하던 시절을 지나와서인지 요새는 깎은 사과 정도는   맛을 즐기며 먹을  있는 사람이 되었다. 건강한 식사에 관심이 생긴 뒤로는 정기배송되는 사과의 일정 지분을 상쇄하며 살고 있다. 싫어하거나 아예 관심도 없던  좋아하게 되는 계기는 곁에 있는 사람을 통해서일 때가 많은데  안에 있는 사람이 꽂혀버렸으니 나도 변화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걸까. 인생에서 가까이해두면 이로운 뭔가를 억지 쓰지 않고 자연스럽게 좋아하게 되었다는   선물을 받은 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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