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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한 편, 우정 한 조각: 저작권 침해의 대가

by 부자뷰티
글 한 편, 우정 한 조각


초등학교 3학년 무렵이었다. 당시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문학적 소양 함양을 위해 백일장을 열었고 자기만의 글을 쓸 기회를 제공했다. 백일장은 일종의 축제 같았다.

각자 자유롭게 뛰놀며 글을 써내려 갔고 어떤 글도 용납되며, 어떤 생각도 받아들여지는 순간이었다.


아직은 글 쓰는 것 자체도 서투른 저학년 학생들에게는 몇 가지 주제가 주어졌다.

그중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나와 가장 친한 친구 자랑하기'였다.


이 주제는 유달리 내 이목을 끌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주제에 딱 부합한 내 친구, 지연(가칭)이가 바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연이는 몇 개월 전 우리 학교로 전학 온 아이였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끌리는 친구였다. 지연이에게 우리 학교 시설이 무엇이 있는지, 급식 메뉴는 어떻게 받으면 되는지 등을 알려주면서 자연스레 친구가 됐다. 집도 근처에 있어서 학교를 오고 갈 때 함께 했으며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과 놀 때면 지연이는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 우리는 마음이 잘 통하는 친구였고 짧은 시간 동안 급속도로 가까워지면서 서로를 '베프(베스트프렌드)'라고 불리는 단짝이 되었다.


'지연이에 대한 자랑이라면 10개도 넘게 쓸 수 있지.'라는 생각으로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한 손에는 연필을 쥐고 다른 한 손에는 원고지에 한 자 한 자 친구의 자랑을 적어 내려갔다. 학교를 마치면 엄마 앞에서 지연이와 어떤 일이 있었고, 지연이는 어떤 걸 잘한다든지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드는 게 일상이었기에 이것만큼은 자신 있었다.


주변 친구들이 글을 쓰면서 머리를 싸매며 힘들어하는 반면 자신 있는 주제인만큼 순식간에 글을 써 내려갔다. 어린 나이에 얼른 적고 친구들과 뛰놀고 싶은 마음에 금세 백일장 글을 완성했다. 금방 끝낸 나를 보던 나의 단짝 지연이가 어느새 다가와 내게 말을 걸었다.


"벌써 다 적었어! 어떻게 적었어? 나도 볼래 볼래!"

"에이, 쑥스러운데. 너 적었어. 쑥스러워서 못 보여주겠어."

"보여줘, 보여줘!."


지연이의 부탁에 민망하지만 '지연이에게 네 칭찬을 내가 멋들어지게 적어났다.'며 자랑하고 싶은 마음 반, 지연이의 부탁 반으로 슬며시 글을 보여줬다. 우리는 서로의 글을 읽었다. 지연이는 다른 주제로 글을 적었는데 글 쓰는 것이 쉽지 않았는지 반 페이지도 글을 못 채운 상태였다.


내 글의 주된 내용은 이랬다. 내 소중한 친구 지연이와 어떻게 만났는지, 지연이의 평소 배려심과 따뜻한 말투, 다퉜을 때 어떻게 현명하게 풀었는지 등 우리의 첫 만남부터 어떻게 친해졌는지, 다퉜을 때 지연이의 배려로 우리가 화해했던 과정 등을 에피소드로 풀어냈다. 내 글을 읽는 지연이가 궁금했는지 갑자기 주변 친구들도 우르르 몰려와서 내 글을 읽었고 친구들도 내 글이 마음에 들었는지 칭찬을 보내왔다. 갑작스럽게 몰려온 칭찬에 마음이 몰랑해졌다.


백일장 결과는 그날 오후 늦게 발표됐다. 학년별로 시상을 하다 보니 내 글도 수상하는 영광을 얻었다.

아이들 글이 얼마나 뛰어나봤겠냐만은 일단 수상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부모님께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얼른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학년별로 수상을 했기에 반에서 수상을 하면 반 단상 앞으로 나가 내 글을 읽는 시간을 가졌다.

뿌듯해하며 내 글을 읽었고 자리에 돌아오니 곧이어 우수상과 장려상 발표가 이어졌다.

장려상은 단짝 친구인 지연이에게 돌아갔다. '지연이도 상을 타다니, 오늘은 최고의 날이다.'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도중에 지연이도 앞으로 나와 글을 읽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지연이도 친구 자랑을 썼는데 그 내용이 내 글과 완전히 판박이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다. 아까 내 글을 먼저 읽었던 다른 친구들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지 표정이 미묘했다.


"이거 아까 네가 쓴 글이랑 똑같은 거 아냐? 지연이가 똑같이 뺏겨 쓴 건가?"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내 짝이 물었다. 나와의 만남, 나의 장점, 나와 어떻게 화해하는지 등 구성이나 내용들이 흡사 쌍둥이 글이었다. 유일하게 다른 점은 글에 대한 표현력이 조금 달랐을 뿐 전반적인 구성과 어휘 선택도 똑같았다. 내가 최우수상을 탄 이유는 지연이보다 글에 대한 구성이나 표현력이 조금 더 나았을 뿐이지 그것마저 유사했다면 사실상 최우수상은 지연이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기분이 이상했다.

'지연이가 다른 주제로 글을 썼던 걸로 아는데 중간에 주제를 바꿨나...'

어떤 주제로 글을 쓰는 건 자유지만 내 글을 읽고 나서, 같은 주제로 같은 구성과 에피소드, 비슷한 단어와 표현을 써서 글을 썼다는 것이 이상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차마 지연이에게 이유를 물어보기 힘들었다. 정작 글의 주인은 나였지만 '왜 내 글을 똑같이 썼어?'라고 물어보면 지연이와의 사이가 애매해질 것만 같았다. 지연이도 자신의 글을 읽은 후, 멋쩍은 웃음만 짓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날은 분명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행복해야 할 날이었지만 지연이도 나도 함께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평소와 같이 밥을 먹고 방과 후 놀이도 함께 했지만 예전의 단짝처럼 거리를 좁히기는 쉽지 않았다. 우정이라는 큰 조각 중 한 조각이 떨어져 나가 빈 구멍이 생긴 것만 같았다. 글을 뺏긴 사람도 빼앗은 사람도 그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그 어린 초등학생의 마음속에서도 찝찝한 기분, 마음 한편에 개운치 않은 감정이 남아 있었다. 이날이 내가 처음으로 <저작권 침해>의 충격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트라우마를 통해 배운 <저작권의 가치>


저작권에 대한 개념을 제대로 이해한 것은 성인이 되고 나서였다.

저작권이 '창작자가 자신의 창작물에 대해 가지는 법적으로 보호받는 권리'라는 것도, 누군가의 저작권을 사용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저작권자의 허락을 받고 출처를 밝혀야 한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게 됐다.


그날 이후로 내게는 약간의 트라우마 비슷한 무언가가 생겼다.

내 글을 남에게 보여주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그중 하나고 내가 다른 누군가의 글을 알게 모르게 뺏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또 다른 두려움이었다. 다행히 내가 염려하는 상황들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


최근에는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훨씬 더 보편화됐으며 이에 대한 인식 제고를 위한 다양한 교육이 진행되고 있다. 초등학생들도 저작권이 무엇인지 알고, 남의 작품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됐다. 많은 사람들이 타인의 글을 존중했고, 각자의 글이 가진 권리를 알기 시작한 것이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그때 차라리 내가 지연이에게 이런 말을 했으면 어땠을까?

"지연아, 이건 내 글이니까 보여줘도 똑같이 쓰면 안 돼."

그랬다면 우리는 여전히 우정의 조각을 잃어버리지 않고 단짝으로 머물렀을까?


물론 지연이가 일부러 악의를 가지고 그랬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어떻게 해석하든 나도 내 저작권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지 못했고 지연이는 타인의 소중한 작품을 앗아갔다.


저작권에 대한 개념마저 낯설었던 나의 초등학교 시절, 그때의 경험을 돌이켜 생각한다.
내 작품에 대한 소중함을 인지하고 타인의 작품 역시 지켜주고 존중하려는 마음.
그 마음의 시작으로부터 소중한 창작물도, 우정도 지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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