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생각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 ... 그것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문학의 쓸모에 대한 문학평론가 김현의 대답이다. 어쩌면 영화의 쓸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문학의 쓸모에 대한 저 문답을 비틂으로써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이 써먹지 못하는 것이라면 영화는 어떠한가. 영화 또한 문학 못지않게 비생산적인 무엇이 아니던가. 영화 또한 돈과 시간을 들이지만 그 소비행위가 끝나고 나면 소비자에게 어떠한 물질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영화는 (결국 영화관에 걸리는 것이 하나의 목표이기 때문에) 곧 본질적으로 상업영화라는 점에서 그 소비행위가 비생산적인 동시에 상업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로부터 영화와 문학 간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문학과 달리 영화는 상업적으로 써먹을 수(?)는 있다는 것, 막말로 영화는 상업적으로 쓸모라도 있다는 것이다(이 문장이 부디 문학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읽히지 않기를 바란다).
비생산적 특성과 생산적 특성을 동시에 지닌 영화, 어쩌면 영화의 진정한 쓸모는 이 양가성에서 확인할 수 있을지 모른다. 표현을 다르게 해 보자면 상업적 생산성이라는 본질에도 비생산성을 향한 영화에서 우리는 영화의 진정한 가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유용성에서 비유용성으로의 지향이며, 인간을 억압하는 것으로부터 인간 해방으로의 지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써먹을 수 있음에도 써먹지 못함을 지향하는 영화, 인간 억압의 가능성에도 오히려 해방의 기능을 수행하려는 노력에서 영화는 7번째 예술이라는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생산성이라는 본질을 거스르지 않는 영화, 다른 표현으로는 비생산성을 지향하지 않는 영화는 어떠한가. 인간의 해방은커녕 인간 인식의 억압을 지속 또는 강화시키는 그런 영화 말이다. 어쩌면 여기서 우리는 비평의 쓸모나 필요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비평은 인식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는 영화에 대해 재해석 및 해체의 역할로서 견제의 기능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비평은 작품에 대한 단순한 가치판단 이상의 작업이 된다.
생각해보면 요즘 같은 시대에 글만큼 무용한 것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그 무용함에도 불구하고, 비평이라는 글은 예술로서 영화를 가능케 하기 위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작업이다. 영화비평은 생산적인 영화에는 해체를 통해 인식의 억압을 방지하고, 반대로 비생산적인 영화에 대해선 그 가치를 발굴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필연적으로 상업성을 띠는 영화. 그러나 동시에 비생산적 특성도 지니는 영화는 분명 양가적인 대상이다. 영화비평은 이 지점에서 자신의 유익함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양가성 사이에서 비평은 파수꾼이 될 수도, 또는 한 권의 잠언서가 될 수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