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보씨 Feb 06. 2024

두 얼굴을 지닌 자여, 그대 이름은 인간이로다

[영화 리뷰]혈의 누(2005)

이 리뷰는 꽤 많은 해당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원치 않으신 분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1808년, 제지업이 발달해 진상까지 하는 동화도.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는 제를 올리던 중, 7년 전에 서학을 믿는다는 혐의로 거열형을 당한 강 객주(천호진 분)의 혼이 무당 만신(최지나 분)에게 빙의하여 마을 사람들을 저주한다. 그 시간 진상할 종이를 싣던 배에 불이 나서 진상할 종이마저 다 타 버린다. 사건을 조사하기 위하여 한양에서 최 차사(최종원 분)와 수행관 이원규(차승원 분) 일행이 파견된다. 섬의 실질적인 지도자인 김치성 영감(오현경 분)과 그의 서자 김인권(박용우 분)이 그들을 맞는데 그 날부터 닷새 동안 네 명의 섬사람들과 차사 일행 중 한 명이, 강 객주와 그의 가족들이 처형당한 방식(효수, 팽형, 도모지, 투석형, 거열형)으로 살해된다. 이원규는 이 살인 사건의 범인을 잡고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감당하기 힘든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영화 <혈의 누> 포스터



데뷔작 <번지점프를 하다>(2000)를 통해 깊은 인상을 남겨준 영화 감독 김대승의 두 번째 작품은 전작과 전혀 다른 역사 스릴러물 <혈의 누>였다. 조선시대 후기 한 섬에서 일어나는 잔혹한 연쇄살인 사건과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젊은 수사관의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은 잔혹한 묘사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로 미성년자 관람불가 등급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200만 명에 가까운 흥행 실적을 올린 수작이다. 한 마디로 미스테리와 스릴러를 베이스로 하고 거기에 공포와 추리를 적절히 배합한 훌륭한 사극이다. 게다가 희생자들을 살해하는 방식이나 강 객주가 처형당하는 장면에서 보이는 슬래셔 영화의 성격까지. 온갖 장르영화를 잘 버무린 맛있는 비빔밥과 같은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영화의 주제를 간단히 말하자면 '인간의 이기심과 이중성'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들은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강 객주'는 신분제에 얽매이지 않는 진보적인 사고를 하는 인물이지만 자신의 딸을 사랑하는 '두호'의 천한 신분을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두호'는 어릴 때부터 자신을 거두어 준 '강 객주'를 배신하고 그를 서학쟁이로 밀고한다. '강 객주'를 조사하러 온 토포사 '이지상'은 '강 객주'가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입신양명에 대한 욕망 때문에 '강 객주' 일가를 잔인하게 처벌한다. 그러면서도 아들에게는 백성들을 인(仁)으로 대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마을사람들은 모두 '강 객주'에게 큰 은혜를 입었지만 자신들의 이익 때문에 '강 객주'가 서학쟁이로 모함을 받을 때 나서서 두둔하지 않는다. 



'김인권'은 흉년이 들었을 때 소작료를 받지 말아야 한다는 '이원규'의 말에 이렇게 답한다.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치 않습니다. 만일 그런 자비를 베푼다면 그 다음 흉년엔 곳간까지 열어달라고 할 것입니다. 강한 자에게 한없이 비굴하고 강한 자가 빈틈을 보이면 그 골수까지 파먹으려 드는 것이 바로 저들의 본성입니다.



시쳇말에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모든 인간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기적이다. <혈의 누>는 그러한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아버지의 불의한 면을 드러내면서까지 '강 객주'의 원한을 풀어주고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자 했던 '이원규'도 마지막에 가서는 사건의 유일한 증거물을 바다에 버리고 사건을 덮어버린다. 인간은 자신과 가족 혹은 가까운 주변인들을 위해 어디까지 이기적일 수 있는 것인지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영화 <혈의 누>






<혈의 누>는 웰 메이드 영화이다. 영화 곳곳에 잔인하고 그로테스크한 연출이 있으나 단순한 고어 영화나 슬래셔 영화만은 아닌 것이 작품이 전달하는 주제가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잔인한 장면 묘사에 면역이 있다면 이 영화는 반드시 볼 것을 추천한다. 자신의 어두운 면을 돌아보게 되는 계기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여담.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차승원 배우의 팬이 되었다. 그 전까지 대체로 잘생긴 얼굴과 훤칠한 키로 코믹 연기를 잘하는 배우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코미디가 아닌 정극에서의 연기도 아주 훌륭하게 소화하여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영화 <혈의 누>


매거진의 이전글 군인의 자격, 인간의 자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