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고백을 하면(수요 없는 공급을 해봅니다), 제겐 꽤 오랫동안 덕질해 온 아이돌이 있습니다. 지금은 중년돌(..)이 되어버린 그들의 소식을 사회면에서 확인하곤 할 때 정말 억장이 무너진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하는 감정을 느낍니다만, 그 애증(애정 아니고요..)의 대상이 있었기에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내가 좋아서 즐기는 덕질 덕분에 잔잔바리 기술을 익히고, 팬이란 동질감에서 비롯된 네트워크도 쌓아보는 등 즐거운 일이 많았으니까요. 일도 덕질하듯 할 때 가장 행복(..)할 것 같은데, 가능할까요?
*덕후, 덕질에 대한 소개는 여기에서 확인하실 수 있어요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를 봤어요. 봉준호 감독이 1990년대 초 활동했던 동아리 ‘노란문 영화연구소’를 다룬 다큐멘터리입니다. 봉준호 감독이 찍은 최초의 단편 영화가 공개된다고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요, 저는 그 작품을 보는 것보다 그때 그 시절 영화광들의 순수함이 흥미로웠습니다.
‘조그셔틀’과 같은 기술을 이용해 영화의 각 장면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마치 집착하듯 영화 비디오를 모으며 소장하거나 대여를 위한 리스트를 만들고, 연구하고, 잡지를 발행하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영화가 너무 좋아 어쩔 줄 몰라하는 마음이 보였다고나 할까요?
아마도 이 말을 들어보셨을 텐데요,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 뭐 그런 말이요. 단순한 표현을 넘어서 즐기는 마음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하게 해요. “나를 즐겁게 하는, 내가 보면서 흥분할 수 있고 빠져들 수 있는 영화를 만드세요. 내가 너무 보고 싶은 영화인데 아무도 안 찍어주니까 내가 만들어버리겠다는 마음으로 해보세요.”(봉준호) 많은 일이 그런 것 같아요.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수는 없다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제일 먼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정말 하고 싶은 게 뭔지 찾는 거죠. 그 안에서 구체적인 가능성을 탐색해 보는 거죠. 내가 즐거울 때 더 할 수 있는 일이 많은 게 아닌가 싶어요.
때는 바야흐로 2010년 1월(...) 강남 교보문고 애니메이션 DVD 코너에서 봉 감독님의 사인을 받았더랬지요. 멀리서 봐도, 가까이에서 봐도, 위에서 봐도, 아래에서 봐... 이러나저러나 봉 감독님인데 왜인지 아무도 그 주위에 가지 않길래, 예의를 잠시 뒤로 물리고 사인을 받았습니다. 그때도 이미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까지... 흥행을 연달아 기록한 감독이었죠. 인생은 타이밍입니다. 제가 언제 또 사인을 받겠어요.
세상은 넓고 유쾌한 사람은 많아요, 새삼 느낍니다. 비영리 영역의 활동가와 개발자가 만나는 모임인 슬러기시 해커스(Sluggish Hackers)가 딱 여기에 어울릴 것 같아요.
"자원도 인력도 부족한 비영리 영역에서 수많은 활동가들이 다종다양한 역할과 고강도 반복 업무를 경험합니다. 웹상에 수많은 정보들이 있어도 원하는 형태로 조직화할 수 없어 활동의 영역이 제한되기도 합니다. 슬러기시해커스는 단순반복 업무와 이로 인해 일어나는 크고 작은 실수가 우리의 한정된 에너지와 시간을 소진시키고 조직의 소통을 방해하지 않도록, 이를 원활하게 만드는 다양한 방법들을 고민하고 만들어냅니다"라는 슬러기시 해커스의 소개글을 읽으면서, 아, 해결 방법을 이렇게도 찾을 수 있구나 싶더라고요. 기술을 가지고 사회문제 해결에 기여하고 싶은 개발자와 적은 인력으로 일당백의 업무를 해야 하는 활동가들의 만남을 통해서 말이죠. 반복 업무보다 단체의 주요 미션 활동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커뮤니티의 취지도, 활동가들의 기술 관련 역량을 키울 수 있다는 가능성도 좋더라고요.
우리끼리 지지고 볶는(..) 것도 방법이지만, 일을 더 즐겁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을 시도해 보는 것이 좋죠! 나의 집중력은 한정되어 있으니 에너지를 쏟아야 할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필요해요. 그래야 즐길 수 있고 더 잘할 수 있을 테니까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판’을 만들려면 역시나 노력이 필요하네요...
오늘 읽은 논문은 <발달장애인 일자리제공형 사회적기업의 비즈니스 방식에 대한 사례연구: 소셜벤처 ‘동구밭’을 중심으로(2021)>입니다.
동구밭은 성공적인 사회적기업 사례로 많이 소개되는 곳입니다. 천연 성분과 유기농 인증 재료를 사용해 고체 화장품과 생활용품을 만들고 있죠. 제품으로만 동구밭을 접한 분들은 친환경 브랜드를 운영하는 회사로 알고 계시겠지만, 발달장애인을 둘러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된 곳입니다.
논문은 발달장애인들과 함께 텃밭을 가꾸는 '동구밭 프로젝트'에서 천연비누를 중심에 둔 사업을 진행하게 된 과정을 찬찬히 살펴봅니다. 발달장애인에게 도시농업을 가르쳐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목적에서 진행된 동구밭 프로젝트는 2014년, 서울시 강동구 상일동 텃밭에서 6개월 동안 진행됩니다. 그 과정에서 발달장애인들이 농사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친구를 만나고 싶어서 농장에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들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일자리가 아니라 친구"였던 거죠. 연구자는 프로젝트팀이 "누군가의 일자리를 만들면서 당사자가 무엇을 원하고 좋아하는지를 묻지 않고 외부 기준으로 발달장애인의 고용 문제를 정의하고 솔루션을 제안하려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라고 서술합니다. 그렇게 다시 당사자 입장에서 발달장애인과 관련된 사회문제를 조사하고, 프로젝트의 방향을 직업교육이 아닌 텃밭을 활용한 사회성 교육으로 재설정합니다.
높은 사회적 가치만큼 수익을 만들지는 못했기에 동구밭은 스타트업이나 사회적기업을 지원해 주는 사업, 대회 등에 참가해 경비 마련을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2016년 말, 외부 투자를 받으면서 동구밭은 약한 수익 모델과 낮은 지속가능성 개선을 위한 사업 아이템으로 천연비누를 결정했어요. 사실 작은 사업장에서 천연수제비누를 제작해 판매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는데요, 동구밭은 초기 자체 브랜드를 만들어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위탁제조를 핵심사업으로 가져갑니다. 당시 대형 브랜드가 원하는 수준으로 안전하고 친환경적이며 균일한 품질을 유지할 수 있는 제품을 생산하는 곳은 없었기에 동구밭은 제조방식을 차별화하고 유기농 인증 등을 적극 활용해 안정적인 고정 매출처를 확보하죠.
이제 막 시작한 작은 기업이 잘하기 어려운 마케팅과 브랜딩은 대형 브랜드가 하고(OEM), 동구밭은 일정한 품질로 생산을 안정적으로 가져가며 역량을 쌓는 거죠(지금은 동구밭의 자체 브랜드에 대한 인지도 많이 높아졌습니다. 위탁생산과 자체 브랜드 비중도 매출 기준으로 비슷하다고 해요). 그렇게 일을 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거죠. 이와 동시에 발달장애인을 불안정한 형태의 보호고용 시스템을 넘어 안정적인 일자리에서 오래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합니다. 논문은 매출에 기반한 고용모델, 비즈니스 모델 혁신, 빠른 조직 실행력, 제품의 경쟁력, 발달장애인 특성을 반영한 인적자원관리, 수평적이고 협력적인 조직문화, 외부 지원과 투자유치가 동구밭의 비즈니스 특성이라고 정리하고 있어요.
프로젝트에서 시작해 130억 원(2022년 기준)의 매출을 올리는 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 덕질하듯 애정을 쏟는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성장이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모든 일엔 그런 애정과 열정이 담겨 있어야 성공(꼭 물질적인 성공이 아니라고 하더라도요)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동력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즐겁게 일할 수 있는 ‘판’을 만들기 위해 우선 하기 싫더라도 그 일을 해내는, 버티는 힘이 우선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들지만, 과감히 여기서 잘라봅니다(..)
연말이 가까워질수록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계획했던 것들과 의지를 갖고 실천하려 했던 일들을 점검하며, 무엇을 이루었고 어떤 부분이 미진했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오늘의논문'도 점검(...)의 시간을 가져보려 합니다!
저, 질문을 던져도 될까요? 뉴스레터를 구독하고 계신 분들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어느 순간 여러분이 실제로 존재하는 분들인지 의심을 하게 됐어요.(죄송합니다...) 사회적경제 영역은 넓다면 넓지만, 또 좁다면 한없이 좁은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거기다 논문 읽기라니! 관심을 가질만한 분이 거의 없으리라 생각하며, 순전히 자기만족을 위해 작업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구독해주시는 분들이 조금씩 생기면서, 앗, 혹시 봇이 자동생성한 이메일로 이루어진 구독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구독자분들께서 어떻게 구독하게 되셨는지, 또 어떤 필요가 있으실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질문드려요!
설문이란 것이 번거로운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막상 뭔가를 만드는 사람의 입장이 되고 보니 묻지 않을 수가 없네요. 그래서 누구나 그 위치에 서야지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고 하나 봅니다. 설문 내용은 다음 뉴스레터에 정리해서 담아보겠습니다. 그렇게 한 해를 알차게 마무리해 보겠습니다! 혼자의 다짐이지만 이렇게 적어놓아야 실천하더라고요. 어떤 의견을 주실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리겠습니다. 사회적경제의 여러 커뮤니티 중 하나가 되면 좋겠단 그런 욕심을 갖고 말이죠!
2022년 8월부터 격주로 발행 중인 <오늘의 논문> 뉴스레터의 내용을 다시 싣고 있습니다. 구독은 아래 링크에서 가능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