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1박 2일 일정으로 제주도에 다녀왔습니다. 업무차 방문했는데, 운 좋게 금요일 일정이라 하루 더 머물다 올 수 있었어요. 제주 원도심에 숙소를 잡고 제주 바다와 산지천을 바라보는 여유로운 시간을 가졌죠. 제주시 건입동과 일도1동을 흐르는 산지천은 제주에서 보기 드문 ‘물이 흐르는 하천’이라고 해요. 제주의 하천 대부분은 비가 올 때만 물이 흐르는 건천이라고 하더라고요. 보기 드물게 ‘흐르는’ 하천을 바라보며,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아두고 싶을 만큼 잠깐의 여유가 감사했습니다.
이번 제주 방문 덕분에 저는 제주시와 서귀포시 시장을 도시자가 임명하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이렇게 무지함을 고백하는 게 좀 부끄럽지만,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알게 된 계기도 우연히였어요. 시내를 잠깐 걸어 다니다 ‘제주형 행정체제 개편’이란 현수막을 봤거든요. 현재의 2개 행정구역(제주시, 서귀포시)에서 동제주시와 서제주시, 그리고 서귀포시의 3개 행정구역으로 나누고 기초자치단체와 기초의회를 제주도민이 직접 선출하는 방식으로 개편을 모색한단 내용이었습니다. 현 상황을 알게 되니 관련 뉴스도 찾아보게 됐어요. 어떤 논의들이 오갔는지 궁금하더라고요. 만약 행정체제를 개편하게 되면, 주민참여와 풀뿌리민주주의 확대, 행정 서비스 강화 등 여러 가지가 순기능을 기대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행정뿐만 아니라 지역단체에서도 도민운동본부를 조직해 서명운동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단 기사도 볼 수 있었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관심이 있는 만큼 알게 되는 거겠죠? 일상의 쉼표를 찍으려 제주를 찾는 그 많은 관광객 중 한 명이었는데, 제주라는 공간과 그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지더라고요. 제 자신도 미처 생각지 못한 계기로 말이죠. 덕후들의 우스갯소리 중 하나가 ‘최애*는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점지해 주는 것’이라고 하거든요. 아이돌에 국한될 것이 아니라 내가 관심 두고 몰두해 시간과 정성을 쏟고 또 거기서 즐거움을 얻는 일이란 게 참 예상치 못하게 언제 어디서고 나타나는 것 같아요.
*최애란 단어가 신조어가 아니라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린 단어라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최애(最愛)는 ‘가장 사랑하는 일’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뉴스레터를 받아 보시는 분들께 여쭤보고 싶어요. 사회적경제를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어떤 식으로든 연결고리를 만들어 사회적경제란 틀 안에서 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어쩌다 사회적경제에 ‘덕통사고’ 당하신 건가요? 처음과 현재를 돌아보면 사회적경제에 관한 생각이나 태도에 차이가 있나요? 차이가 있다면, 그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하시나요?
사회적경제의 규모나 가치를 숫자로 이야기할 수 있지만, 숫자로 다 이야기할 수 없는 것들이 분명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거겠죠. 듣고 말하고, 그렇게 스토리가 만들어집니다.
근데 저는 사람들과 만나 대화하며 공감하는 그 과정에서 빠르게 소진되는 사람이라 만남에 부담이 있어요. 일로 만나거나 일회성 만남이라면 그 부담이 살짝 덜하긴 하지만, 여하튼 제 개인적인 성향으로 인해 무수한 질문들을 꾹꾹 눌러 담고 있습니다. 혹시 여유가 있으시다면, ‘오늘의 논문’에 의견 보내기에 생각을 나눠주시면 너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 살펴볼 논문은 <제주 사회적경제 조직의 지역성과 이시돌협회의 경험을 통한 지속가능성(2023)>이란 제목의 박사학위 논문입니다. 지난해 ‘오늘의 논문’에서 어떤 연구자료를 다뤘으면 좋을지 설문을 진행했는데, 그때 지자체 연구원들이 해당 지역의 과제와 연계해 소셜 섹터에 관한 연구를 어떻게 진행하고 있는지 살펴보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저도 이 의견에 공감해 관련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도 제주연구원, 제주여성가족연구원 등에서 사회적기업, 협동조합 관련 보고서를 찾아보았으나 최근 자료가 거의 없더라고요. 최신 연구자료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제주도 사회적경제 현황이 어떤지 궁금했거든요. 그렇게 찾다 만난 것이 이번 뉴스레터에서 다룰 논문입니다.
참고로, 가장 최근의 제주도 사회적경제 현황은 <제2차 제주특별자치도 사회적경제 발전 기본계획(2020)> 연구 보고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논문에서 주로 분석한 대상은 이시돌목장(이시돌협회)으로, 현재 사회적경제 조직 사례와 비교 분석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습니다. 이시돌협회는 법인격상 사회적경제 조직에 해당하지는 않지만, 그 운영 방식은 사회적경제의 원리와 매우 유사합니다. 1954년 제주에 온 맥그린치 신부는 제주가 겪는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목축업 육성을 목표로 이시돌목장을 시작했습니다. 1962년 설립된 이시돌협회는 비영리재단으로, 목적사업의 수익을 주로 돌봄과 복지 분야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시돌협회의 재정은 이시돌목장, 사료공장, 우유부단 사업의 지분에서 비롯되며, 주요 활동은 요양원, 호스피스, 어린이집, 청소년 젊음의집, 피정의집 운영, 그리고 마(馬)산업을 포함한 축산업입니다(이시돌목장의 사업 및 활동 현황을 확인하시려면 본 논문 93쪽의 표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저에게 이시돌목장은 '우유부단' 카페와 테쉬폰 건축물로만 인식되었는데, 맥크린치 신부의 이시돌목장은 지역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공간이자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고 선순환시키는 협동의 공동체 그 자체였습니다. 연구자가 정리한 바에 따르면, ‘의식주의 해결’(목장 운영, 양돈협동조합 설립 등) → ‘소속감의 해결’ → ‘공동체로 묶기’(유아원/유치원, 요양원, 호스피스 설립 등)라는 과정을 통해 공동체 경제의 지속가능성과 가치 창출이 이어집니다(논문 본문 108쪽 참고). 이러한 경험은 이시돌협회 내에서 자활사업, 협동조합, 사회적기업(피정의집), 마을기업(한림수직)이 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됩니다.
물론 항상 잘 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연구자는 “대기업에 토지 매매, 금악 본동 주민들과 끊임없는 마찰, 성이시돌 의원의 철수, 한림수직사 폐업, 양돈조합 폐업, 이시돌 치즈공장 양동, 옹포리 양돈 가공공장 양도” 등 여러 실패의 사례를 언급합니다. 그럼에도 맥그린치 신부는 “어려움에 봉착하고 결정을 내릴 때 항상 지역 우선의 법칙”을 따랐다고 해요. “지역 기반 사업으로 얻은 이익의 혜택이 지역주민들에게 돌아가도록 협동과 결속의 길을 걸었다”라고 말이죠.
제주라는 지역의 자원을 활용하고, 지역의 필요를 반영한 사업과 활동을 펼치며, 그렇게 만들어진 이윤을 다시 지역에 환원하는 것. 이 논문을 읽으면서 새삼 지역의 가치와 의미를 중심에 두는 것이 사회적경제 조직을 다른 조직들과 구분 짓는 핵심적인 특징이라는 점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커다란 목표를 세우고 큰 그림을 그리며 시작할 수는 없겠지만, 사회적경제 활동의 본질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나와 이웃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 범위 안에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잘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봅니다. 사회적경제가 단순히 경제적 이익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고 공동체의 가치를 높이는 데 중점을 둔다고 한다면, 이러한 접근 방식이 우리 모두가 더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동안 오늘의 논문은 격주 발행이라는 나름의 정기성을 갖고 진행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번부터는 비정기적으로 발행하려 합니다. 사회적경제와 관련된 다양한 연구자료를 충실히 살펴보는 것에 집중해야 하는데, (제 스스로 정한) 정해진 일정에 맞춰 뉴스레터를 발행하는 데만 급급해 오히려 본질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앞으로 연구자들께서 작업한 귀중한 자료의 요모조모를 꼼꼼히 살펴볼 수 있도록 더욱 열심히 읽고, 분석하고, 해석하겠습니다. 하나의 연구자료만이 아니라 그와 관련된 국내외 자료들도 함께 엮어 종합적으로 살펴보겠다는 야심 찬 다짐도 해봅니다. 물론 다짐이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겠죠. 부디 다짐에만 그치지 않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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