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은 우울과 고통의 시간이었다. 자존감은 경험해본 적 없을 정도로 낮아졌고, 때로는 자신감이 조금도 없어지기도 했다. 하루는 수영 강습 시간에 접영을 배우던 중이었는데, 출발하고는 팔을 두어 번 젓다가 자리에 멈춰 일어서 버렸다. 강사님은 왜 멈추냐 소리쳤고 "자신이 없어서요”라고 내뱉었다. 동시에 스스로도 이런 대답을 했다는 점에 놀랐다. 평소 같으면 머리로는 아는데 몸이 안 따라준다던가, 다시 해보겠다고 웃으며 답했기 때문이었다. 강사님도 내 상태를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잘하고 있다며, 계속 그렇게 하면 된다고 북돋아 주셨다. 강습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서 왜 이렇게 되었는지 생각했다.
아주 가끔은 거대한 우울감이 있었다. ‘삶의 의미란 뭘까'와 같은 답도 없는 질문들을 떠올리곤 했는데 최근의 고민은 군대에서였다. 상대적으로 몸이 편한 부대였기 때문에 정신적인 고통을 주는 부조리가 많았다. 뜬금없이 너의 잘못된 점을 찾아보라며 세면도구의 오와 열을 지적한다던가, 생활관에서 이빨을 보이며 웃으면 좋은 일 있냐며 핀잔을 주는 유치한 일들이었다. 때문에 전역 후 사회에서 선임을 만난다면 어떻게 행동할지 상상하곤 했다. 나의 관심은 선임에서, 사회를 거쳐, 다시 나로 돌아왔는데 행복에 대해 고민해보는 시간이 있었다.
시작은 행복해지는 법에 대해서였다. 다음은 무엇이 행복인지 정의하려 했다. 많은 책을 읽었지만, 당시에는 다른 관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사고의 발전은 없었다. 오히려 행복이 추구해야 되어야 하는 대상인지 의구심을 만들어냈다. 행복이 답이 아니라면 '왜 살아야 할까'하는 의문을 가진 채로 전역했다. 복학 후 우연히 고등학생에게 독서토론을 지도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멘토였던 나는 지정도서였던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어야만 했다. 책에서 이전의 의문을 해소할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납득할 만한 논리였기 때문에, 스스로 생각해서는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임시 답으로 정해두었다.
팀 페리스는 중요하건 아니건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질문에 시간을 할애하기 전에 다음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예"인지 확인하라고 한다.
1. 이 질문의 각 단어에 대해 단 하나의 의미를 정할 수 있었는가?
2. 이 질문에 답하면 상황이 더 나아질 수 있는가?
대부분의 철학적 고민에서 벗어날 수 있다며 추천하는 방법인데 행복과 삶에 관한 질문은 이 도구에 깔끔하게 여과된다. 그래서 임시 답변으로 덮어두었던 질문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난 달 서은국 교수님의 ‘행복의 기원'을 읽으며 전환점을 다시 한번 가진다.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행복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관점이고, 진화론적 행복을 대척점으로 소개하며 시작한다. 나는 처음 몇 페이지부터 마음이 좋아졌다. 의미를 정의하는 것은 일반적인 전개 방법이고, 진화론 이야기를 지금까지의 많은 글과 말에서 누구도 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냥 내가 이제야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겨우 몇 달의 연습이기에 완벽과는 거리가 있지만, 나는 자유형 다음으로 접영에 자신 있게 되었다. 강습에 성실하게 참여하고, 주말 자유 수영을 가곤 했을 뿐인데 곧잘 하게 되었다. 그 사이 마음의 안정을 찾았음은 물론이다. 겨울을 보내며 앞으로는 마음이 좋지 않을 때도 주저하지 않고 병원에 가야겠다고 생각한다. 여건이 되지 않으면 진통제라도 먹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신체적, 사회적 고통은 뇌의 같은 부위에서 발생한다고 한다. 그래서 몸이 아플 때 것처럼, 마음이 아플 때도 진통제는 효과를 보인다고 한다. 이전 회사 대표님으로부터 배운 점 한 가지는 ‘고통을 견디지 말라는 것’이다. 뇌는 고통을 경험할수록 민감해지기 때문에 나중에는 적은 자극으로도 큰 고통을 느낀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탕비실에는 진통제가 있었다.
아픔을 느끼면 병원에 가자. 아니면 진통제라도 먹자. 몸이든 마음이든. 시간이 해결해 줄지도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