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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PRICORN Sep 09. 2024

삔 발목이 준 소소한 즐거움

급 떠난 강릉 여행


다리를 다쳤다. 월요일에.

발목과 골반에 약침을 맞고 나니 멍투성이가 됐다. 여전히 뻐근한데, 골프도 금지, 등산도 금지. 모든 게 금지됐다.

토요일에 등산 가기로 했었는데 발목이 이 모양이니 취소할 수밖에.

근데 나 진짜 희한하게도, 틈만 나면 그 시간을 뭘로 든 꽉꽉 채우고 싶어 하잖아. 그래서 자유시간을 참지 못하고, 강릉으로 떠나버렸다. 금요일 밤 출발. 처음이었는지, 오랜만이었는지 나도 모르겠다.

오빠가 펜션을 예약해 놨고, 출발 당일에야 그곳이 어딘지 알았다.

생각보다 추웠던 그날, 밤 12시에 도착했는데, 한옥 펜션은 생각보다 어두침침했다. 솔직히 기대에 못 미쳤다.

하지만 맥주 한 잔으로 위로하며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새벽, 태식이가 난리 쳤다. 아우성치면서 화장실 가겠다고 깨우더니 결국 여섯 시에 일어나 펜션 밖으로 나갔다.

근데 문을 열자마자 보인 풍경이 기가 막혔다. 바로 앞에는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있고, 그 옆엔 논이 넓게 펼쳐져 있더라.

태식이는 볼일만 해결하고 펜션으로 돌아가겠다고 멍멍 짖어댔지만, 나는 그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강릉이라 하면 바다만 떠올렸는데, 이런 논 풍경을 마주할 줄은 몰랐다. 시원한 아침 공기를 가득 들이마시고 다시 잠을 잤다. 잠결에 느껴지는 건, 이게 뭐지?

 고양이였다. 이 고양이가 얼마나 개냥이던지, 내 발에 슬며시 몸을 비비며 다가왔다.

그때 태식이는 어찌할 바를 몰라 나한테 더 바싹 붙더니 아양을 떨기 시작했다.

팔자에도 없는 고양이와 강아지를 동시에 쓰다듬는 진귀한 아침이었다. 태식이랑 여행하면 갈 곳이 한정적이다. 근데 오히려 그 덕에 선택지가 줄어들어 고민할 필요가 없으니 좋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찾아간 초당순두부집에서 태식이에게 오징어를 먹이고, 안목해변에 가서는 커피를 마셨다.

젤라토 먹으면서 바닷가를 거닐다가 사진도 찍고, 시장에 들러 막걸리, 회, 문어버터구이를 샀다.

문어는 질겨서 별로였고 회는 기대에 못 미쳤지만, 막걸리 하나는 정말 제대로 건졌다.

시장 사장님이 친절하게 김치랑 깻잎 쌈장까지 챙겨줘서 오빠가 고기를 구웠다.

 오빠 고기 굽는 솜씨가 제법 늘었는지 육즙이 나쁘지 않았다. 좋은 공기, 논밭 풍경, 그리고 한가로운 시간을 만끽하면서 먹는 음식은 그저 완벽했다.

산책하고, 만화 '던전밥'도 보고,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다음 날은 두부 부침과 실패한 물라면으로 아침을 간단히 해결했다. 10시쯤 출발했으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애매한 시간.

약 3시간 30분 정도 걸려 영등포에 도착했다.

조수석에 앉아 있었음에도 왜 그렇게 피곤한지 모르겠지만, 날씨도 좋고, 풍경도 멋졌고, 사람과 개 모두 재밌었으니 그걸로 된 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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