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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프리 Jun 15. 2022

공무원합격 못하면 30대 독신 여자 먹고살 수 있나?

다음을 생각하기 두려웠던 자신의 몸이 일으킨 반란

4월, 공시생이라면 알 듯한 단어의 어감이다. 어딘가 초조하고, 아직 나는 준비되지 않았는데 어째서 시간이 이렇게 되었는지 야속하고. 입이 의식하지 못하는 중 말라가는 느낌을 주는 디데이의 마감.


4월에는 공무원의 국가직 시험이 있다. 보편적인 일반행정을 꿈꾸거나 우정직과 같은 지역이 한정된 직렬, 혹은 직업상담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택하는 직업상담직, 그 외에도 관세직, 세무직, 시설직, 전산직, 교정직 등이 있는 시험.


옛날 옛적 벚꽃의 꽃말이 중간고사라는 우스갯소리가 돌았던 적이 있다. 공무원 시험을 앞두고 그 오랜 우스갯소리가, 더 이상 별로 우스갯소리로 다가오지 않았다. 4월에 합격해 놓아야 6월에 있는 지방직 시험을 치를 때 더 마음이 편할 수 있는데, 하며 스스로 부채질하는 불안감.


스물아홉의 봄에 사표를 내고, 서른의 봄에 무직의 상태로 다가오는 겨울을 맞았다.


문제는 2월 말경 몸이 더 이상 불안해하면 안 된다고, 차라리 앓아 누우라고 시위를 하며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무엇을 특별히 잘못 먹은 게 아닌데도 장 질환이 멈추지 않았다. 포카리 스웨트만 먹어도 설사가 계속되었고, 탈수가 너무 심해 더 이상 동네 병원에서는 500ml가량의 수액으로는 택도 없다고 두 손 두발을 들었다. 


그렇다고 입원을 바로 하기엔 스스로 세워 놓은 진도표를 다 완수하지 못한 것이 걸렸다. 가족 중 아무도 나의 입원에 보증인을 안 서줄 것도 걱정이었다. 그렇게 동네 병원을 다니며 몇 주간을 고생하다 결국 시험 전날, 2리터 이상의 수액을 맞고 컨디션을 회복해서 시험장에 가는 것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예상했던 대로 가족은 아무도 입원 보증인을 서 주지 않았다. 오히려 얼마나 크게 화를 내던지. 시험을 안 볼 작정이냐, 시험 끝나고 병원 가도 되는 걸 과장해서 아프다고 한다.


예상. 예상했던 문제가 나와도 기쁘기 어려운 마당에 나온, 자신을 향한 모욕에 다시 한번 '나는 안정적인 직장을 잡아서, 건강하게 혼자 잘 살 거야.'라는 다짐을 곱씹고 시험 전날,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입원할 때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던 나보다 나이 있는 친척의 양해를 구해, 보증인에 친척의 이름을 기입하고 입원했다. 그리고 2리터 수액을 끊임없이 맞았다. 독서실에서 가져온 수많은 수험서들을, 오후 9시 반이면 천장 불이 꺼지는 종합병원에서 휴게실 티브이 근처의 작은 조명등이라도 찾아서 한 번 더 훑었다.


다음날 병원 외출증을 끊어 택시를 타고 응시장까지 향했다. 어떤 정신으로 풀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분명 정신없이 시간에 맞춰서 풀었으나 시간 부족으로 사회 과목 중 경제 파트는 두 문제를 풀지도 못했다.


종료 벨이 울리고 휴대폰을 다시 찾아가고. 복도를 나서는데 수험생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 시험 왜 이렇게 쉬워? 나 다 풀고 몇 번이나 다시 봤어.' '그렇지, 너무 쉽더라. 이번에 합격컷 엄청 올라가는 거 아냐?'


직감적으로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전혀 쉽지도 않았고, 시간 부족으로 풀지 못한 문제까지 있었으니.


그래도 장하다, 이 컨디션에 이 정도 풀었으면 난 다 한 거지. 나를 위로해 줄 오랜 친구에게 전화를 걸고, 4월 시험은 지났지만 6월 시험이 있으니까 난 괜찮다고, 할 수 있을 거라고. 동의를 구하기 위해 한 전화의 상대방이라 친구는 당연히 긍정의 말을 쏟아부어 주었다.


그렇게 택시를 타고 다시 돌아온 병실. 폐렴 환자와, 치매기로 끊임없이 찬송가를 부르는 분과, 치매로 아드님에게 밥 차려 주러 가야 한담 끝없이 소리 지르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나를 맞이해 주었다.


주말에 시험이어서 당직 의사가 없어서 퇴원을 못하고, 불편한 주말을 그분들과 함께했다.


다음 주 퇴원을 하고, 드디어 가족의 동의를 얻어 더 큰 대학병원을 갔다. 각종 검사를 했으나 다행히 이상은 없었다. 문제는 몸이 한 번 일으킨 반란을 진정시키려는 기세가 늦는다는 거였다.


언제 반란이 사그라들지 조마조마해하며 대학병원이 처방해 준 약을 먹으며 지내던 며칠, 어느 날 독서실에서 돌아왔는데 내 방 책상에 아주 작은 쪽지가 있었다. 가족이 쓴. 


'너무 부담 갖지 말고 해.'


몸의 반란은, 정신이 이 쪽지의 말을 흡수하자 허무하게 스러지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어떻게 먹고살지 부담'을 스스로 지우고 있지 않아도, 어떻게든 입에 풀칠은 하며 먹고살 수 있겠지. 그게 아니더라도, 가족이 사는 본가에서 길가에 내쫓길 일 정도까지는 발생하지 않겠지. 이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더라도, 길바닥에 앉지는 않겠지.


결국 이렇게 내 불안감이 일으킨 반란은 정말 기적처럼, '마음을 편히 먹자' 며칠 만에 가라앉았다. 한 달을 고생했던 몸이, 저 말을 덥석 먹은 후 얼마나 큰 안도감을 느낀 것인지.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주지 못했던 구원이, 조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6월 시험에 합격했다. 이 년여 만에 그만두게 된 그 '공무원' 시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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