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워본 적 없는 '장애'

6.4.2022

by 채플힐달봉



나는 그럴 수 있죠! 다운증후군을 처음 보는데.
그게 잘못 됐다면 미안해요.
그런 장애가 있는 사람을 볼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학교, 집, 어디에서도 배운 적이 없어요.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14화에서 정준이 다운증후군 영희를 만나 놀란 후, 영옥에게 건넨 대사이다.

이 대사 한마디가 주는 마음의 파장이 너무 커서 일주일이 지나도록 먹먹하고 시리다.

'장애'를 배워본 적이 없다는 그의 다소 억울한 외침에, 그러고보니 나 역시 자라는동안 그 어디에서도 장애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배워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도 그런 지 모르겠지만 내가 어릴 때에는 학교에서 '도덕' '윤리' 교과를 배웠다. 우리는 책 속에서 다름을 인정하라 배웠고 직업에는 귀천이 없으며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갖추어야 한다고 배웠다.

분명 배웠는데, 초중고 합쳐 무려 12년을 배웠는데! 어째서 우리는 머리로 아는 지식을 몸으로 습득하지 못한 채 사회로 던져진 것일까? 막상 사회에 나와보니 '장애'를 찾아보기조차 어려웠다. 서른 다섯이 되어서야 겨우 처음 다운증후군을 마주한 드라마 속 정준처럼 일상 속에서 장애인을 마주치기란 흔한 경험이 아니었다.




미국에 와서 본 생소한 풍경 중 하나는, 어느 곳에나 장애인이 있다는 것이다.

학교, 도서관, 식당, 공원. 어디에나 장애인이 함께 있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사람이 식당에서 서빙을 하고 휠체어를 탄 직원이 애플 매장에서 손님들의 불편사항을 접수하고 말이 어눌한 자폐를 가진 사람이 대형마트 캐셔로 일을 한다. 당연하지만 생소한 이 풍경에 처음에는 다소 놀랐다. 이 나라에는 어찌 이렇게 장애인이 많은 것일까?

미국이라고 유독 장애인이 많은 것은 아닐 텐데도 크는 동안 두어번 마주쳤을 뿐인 '장애'를 한꺼번에 몰아 맞닥뜨리다보니 '미국에는 장애인이 많다' 라는 어이없는 결론이 나온 것이다.

엔젤만증후군을 가진 아이를 낳아 키워보니 한국에는 장애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장애가 밀려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장애인을 위한 사회적 인프라 구축은 늘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장애인을 위한 시설은 혐오시설로 간주되어 외곽으로 밀리고 밀려 깊은 구석으로 감추어야만 했다. 장애는 배려의 대상이 아니라 수치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버린 현실.

우리는 모두, 다름을 인정하고 사회적 약자를 배려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막상 맞닥뜨린 이질성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엔젤만증후군 아이를 낳기 전의 나 역시 다를 바 없이, '장애'에 놀라고 두려워했으며 되도록 피하려 했다. 배워본 적 없는 장애는 두렵고 낯선 존재 일 뿐이었다.


미국 학교에는 '도덕' 교과가 없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식을 글로 배우지 않는다.

사립으로 운영되는 특수학교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장애 학생들은 일반 학교를 다닌다. 장애의 정도에 따라, 도움을 받아야 하는 정도에 따라, 일반 교실에 배정 되기도 하고 특수 교실에 배정되기도 한다. 비장애와 장애가 공존하는 학교. 아이들은 체육시간에 장애를 가진 아이들과 함께 몸을 부대끼고 학교 행사를 함께 준비하고 같은 테이블에 앉아 점심을 먹는다. 아이들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장애에 대해서 배워간다. 놀이터에서 공원에서 도서관에서 비장애와 장애가 섞여, 같은 풍경을 공유한다. 장애 아이들의 다가옴을 흠칫 피하거나 낯선 행동 습관에 대한 혐오가 없다.

첫째 아이의 교실에 다운증후군 아이가 있었다. 5살 때부터 한 학교에서 쭉 함께 자라왔으니 벌써 8년 세월을 지켜봤다. 그 아이는 내 딸을 퍽 좋아했다. 한 동네에 살았으니 스쿨버스도 같이 타고 집으로 왔다. 한번은 그 아이가 딸 아이의 얼굴을 할퀴었다. 딸 아이 말로는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어쩌다보니 실수로 그랬다 했다. 그 아이의 움직임이 어눌하고 민첩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딸은 이해하고 있었다. 그 아이의 입술은 늘 반쯤 열려 있었는데 (다운증후군 아이들은 혀가 두껍고 근육이 약해서 입을 꼭 다물기가 어렵다) 그것을 보고 딸아이가 나에게 물었다.

" 엄마, 루벤스는 항상 입을 '어~' 하는 것처럼 벌리고 있어."

친구에 대한 단순한 묘사였을 딸 아이의 그 말에 입을 벌리고 있는 루벤스의 얼굴이 떠올라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는데 그런 나를 보고 딸이 한마디 했다.

" 엄마, 왜 웃어? 그건 웃으면 안되는 거야!"

따끔했다. 웃음의 의미가 비웃음이 아니었는데도 딸의 나무람을 듣고 나는 흠칫 놀랐다. 그러면서도 나를 꾸짖는 딸 아이의 자연스러운 '배움' 에 내심 흐뭇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장애'에 대한 배움은 '기다림'으로 가장 먼저 드러나는 것 같다. 느림에 대한 배려.

식당에서 주문을 받는 서버가 더듬거려도 재촉하지 않고 휠체어를 탄 직원의 걸음이 느려도 이해하며 상품 바코드를 찍는 손이 헤매어도 묵묵히 기다려 주는 여유를 배운다.

그래서, 미국이라는 나라에는 장애인이 많다.

학교 연례 행사 때 학년별로 아이들이 나와 그간 준비했던 공연을 선보였다. 루벤스가 속한 학년의 순서가 되었고 마침내 준비한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쳤을 때 온 학교가, 학교에 모인 모든 관객이 루벤스의 성공을 축하해 주었다. 그 어느 때보다 열렬한 응원과 찬사! 성취감과 흐뭇함과 감격과 감동이 어우러지는 순간이었다. 감출 수 없이 터져나오는 거대한 에너지가 사회를 건강하고 풍요롭게 만든다.

공연이 끝난 후 딸 아이가 말했다.

" 엄마! 오늘 루벤스 참 잘 했어!!"

친구를 향한 애정과 기특함이 묻어났다.


'장애'를 배워본 적 없는 내가 이제야 비로소

장애와 공존하는 법을 조금씩 배워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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