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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Apr 14. 2022

여로에서 (30)

운명에도 팁이 있다면


 날씨가 맑게 갰다. 구름 한 점 없는 아침이었는데—미술관 쪽으로 걸어가는 도중 비행체 하나가 하늘을 쪼개는 소리가 났다. 여객선이 아니라는 점은 명백했다.



 도시는 전날과 비교해 무서우리만치 고요했다. 대도시의 한 가운데임에도 지나다니는 행인이 거의 없었다. 가끔 스쳐 지나는 차들도 엔진소리를 내지 않는 것 같았다. 가파른 하늘, 깨끗한 거리. 그 사이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것들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미처 보이지 않는, 남쪽 저 어딘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고는 있다’는 듯이.

 궁전 앞 광장 역시 어제보다 휑했다. 그저 엉성한 코스프레로 사진을 팔려는 가짜 왕과 왕비가 두 쌍 늘어있었고, 그 중에서 차르 복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오 쟤 어제도 봤는데’ 하는 표정으로 다가오기에 서둘러 신관 건물로 들어갔다.



 근현대. 예르미타시 미술관의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소장품을 놓을 자리가 없어지자, 주위 건물들을 하나둘 편입시키는 식으로 확장해왔다고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19세기 이후 인상파 작품들, 후기 인상파와 아르누보 그리고 모더니즘 시기에 이르는 소장품들은 본관에서 분리돼 이곳 신관으로 옮겨졌다. 겨울궁전과는 광장을 사이에 두고 병풍처럼 서있는 건물. 웅장한 규모로 보면 원래부터 궁전의 일부로 지어진 게 아닌가 싶지만, 원래는 군 참모본부로 쓰이던 곳이었단다. 구글 지도 상에서도 General Staff로 나와있어서, 들어가서 확인할 때 까지도 여기가 맞는지 긴가민가 했다. 이런 시기에 군 관련 건물에 잘못 들어가서 좋을 거라곤 하나도 없다.

본관과 비교하면 확실히 현대적이다. 내부에 엘리베이터도 있고, 안내판넬도 디지털 화면으로 돼있다. 전시장은 2층에서 4층까지 둘러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4층은 19-20세기 유럽 회화 전반, 3층은 주로 러시아 자국의 미술품, 2층에는 아르누보관을 포함해 다양한 테마전시가 이뤄지고 있었다. 여전히 크긴 하지만 본관만큼 절대적인 규모는 아니다. 시간만 충분했더라면 모든 층을 찬찬히 둘러보았겠지만….

 ‘내일 새벽 핀란드에 가야한다’는 사실 하나가 사람을 적잖이 재촉하고 있었다. 러시아 국립 박물관 표도 예매해둔 상황이었고, 해가 지고나면 어디 돌아다니는 것이 여의치 않다는 점도 알았다. 더구나 4층이 내가 아는 그 전시관이 맞다면, 그런 걸 원껏 본다고 가정하면—다른 층까지 다 볼만한 여유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따라서 처음부터 ‘다른 층은 못본다’고 상정을 하고 입장했다. 솔직히 러시아 제국과 관련한 미술품은 이미 많이 보기도 했다. 여러가지 의미로, 더는 제국적인 무언가를 느끼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들었다.

 신관 4층까지 가는 길은 깔끔하지만 협소하다. 시간대가 평일 오전이고, 시국이 이래서 외국인 관광객도 없었으니 망정이지, 평소라면 엄청나게 붐벼 입장하기까지도 꽤 시간이 걸렸을 것 같다. 그저 내게는 크기만 크고 사람은 별로 없는 관공서처럼 느껴졌지만.



 잔혹할 정도로 쾌적한 전시관람이었다. 첫 번째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모네의 풍경화들이 줄을 이어 등장했다. 뒤이어 카미유 피사로, 귀스타브 쿠르베가 나오더니, 드가의 누드화와 누드 조각상이 세트로 따라 나왔다. 화면으로만 보던 마네도 있었다. 르동은 템페라화가 한 점 걸려 있었으며, 르누아르는 대여섯점이나 되는 유화가 걸려 있었는데 '정원에서In the Garden'는 꼭 어디선가 본 듯 익숙하고 르누아르 같은 그림이었다.

이 정도면 하이라이트는 다 봤나, 싶어서 다음 방으로 넘어가자 세잔의 사과가 나왔고, 그 다음 방에는 고갱의 타히티가 나왔다. 기름물감의 질감이 그대로 느껴지는 고흐의 풍경화, 초상화. 드랭과 마티스가 떠오르는 폴 시냑Paul Signac의 색채는 눈앞이 절로 흐려질만큼 좋았다. 한국에서도 봤던 피에르 보나르의 작품도 있었으며, 피카소와 마티스 컬렉션은 그야말로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레벨이었다.



 어릴 적 교과서 표지 그림으로 접했던 마티스의 <춤>과 <음악>이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며 벽면 반절을 치고 앉아 있었다. 특히 후자는 <무기여 잘 있어라>의 표지로도 익숙한 그림이었는데… 민음사의 경우 헤밍웨이의 작품은 전부 마티스 그림을 표지로 해놨다. 하기는 말년까지 스페인뽕에 심취해있던 양반이었으니 적절하다고 해야할까.

 하여간 그곳에 있는 그림들은, 그 중에 몇 점만 한국에 대여해와도 특별 전시티켓이 불티나게 팔릴만한 것들이었다. 문제라면 그렇게 유명한 작품 앞에 나말곤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눈여겨 감시하는 사람도 없었다. 내가 마음만 먹었다면 그 마티스의 위대한 그림에다가 어글리 코리안 돌려차기를 먹이는 것도 가능할 성 싶었다. 그랬담 파란 배경에는 컬럼비아 여행용 부츠의 발자국이 찍혔을 것이고, 나는 그길로 경찰에 연행돼 고문을 당하든 총살을 당하든 했겠지. 어쨌거나 그만한 그림을 물어줄만한 돈이 내게는 없으니까.

때마침 종소리같은 것이 들렸다. 창 바깥 광장 쪽에서 새들이 날아가는 소리도 들렸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흑사병이 창궐하던 중세시대의 영국. 그 당시 교회는 사람이 죽을 때마다 종을 울려 부고를 알렸다. 마을 사람들은 종이 울릴 때마다 ‘이번에는 누가 죽었는지’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는데. 성공회 신부인 존 던John Donne은 자신의 시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모든 이들의 죽음이 나를 위축시킨다, 나는 인류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Any mans death diminishes me, because I am involved in Mankinde. / 그러니 누구를 위해 종이 울리는지 알려고 하지 말라; And therefore never send to know for whom the bell tolls; /  종은 바로 당신을 위해 울린다 it tolls for thee.



  시를 쓴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도 흑사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말마따나 어떤 인간도 섬이 아닌 것이다. 아무 관계 없는 사람은 없다. 모든 종은 나를 위해 울린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헤밍웨이. 가혹한 스페인 내전 중에서도 사랑에 빠지는 남녀. 다리처럼 폭파당하는 인연과 스페인 화가의 그림까지가 전부 하나의 맥락 속에 일어나는  같아 별안간 다리가 후들거렸다. 나는 거기서 그림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미술관에는 야속할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마지막은 칸딘스키의 그림이었다. 후기 인상파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이는, 비교적 평범한 풍경화도 보았다. 하긴 칸딘스키라고 해서 줄창 어려워보이는 그림들만 그려냈던 건 아닐 것이다. 구상을 비롯한 초현실주의 작품이 기대이상으로 널리 알려졌을 뿐이다. 창작자에게 있어 대표작의 존재란 양면적인 것이다. 대표작없는 창작자는 외면받지만, 대표작뿐인 창작자는 오해받는다. 구스타프 에펠은 자신이 지은 탑을 평생동안 질투하며 살아야 했을 것이다.



 4층 관람을 끝내고 로비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거쳐가는 2층에 아르누보 전시가 있다고 해서 잠깐 들러볼랬더니 문이 꽝 닫혀 있었다. 옆에 안내인에게 물어보았더니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서 지금은 볼 수 없다고 했다. ‘이런저런 사정’이라니, 얼마나 편리한 설명인가. 나는 순간 내가 길을 잘못 들었나 생각했다. 나오는 길에 기념품샵에 들러 조금 둘러보다가, 시냑의 작품 한 점이 캔버스로 나와있길래 큰 맘 먹고 사서 나왔다. 부디 캐리어 가방에 들어가는 크기이길 바라면서.

 오후 세 시에 맞춰 PCR검사소에 도착했다. 검사는 금방 끝났다. 결과는 내일 이메일로 통지될 거라고 했다. 조금 불길했다. 이메일로는 안 좋은 소식밖에 받지 못했는데.

 검사가 끝나고 나서 주위 지도를 살펴봤다. 마침 도스토옙스키 기념 박물관이 근처에 있어서 잠깐 들르기로 했다. 가는 길목에 카잔 대성당이 또 한 곳 있었는데, 나는 다른 러시아인들처럼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지나왔던 것 같다.

 도스토옙스키 기념 박물관은 그가 생전에 살던 상트페테르부르크 아파트를 보존해놓은 곳이다. 아래층에 본인이 직접 쓴 원고지나 책의 초판 같은 것들을 전시해놓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평범한 19세기 러시아 중산층 아파트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수리코프 박물관과 비교하면 도시적인 방식으로 협소하다. 작은 벽난로가 있고, 집필실처럼 보이는 곳에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원목책상이 놓여 있었다. 수평이 안 맞아 흔들릴 것 같진 않은 그런 견고한 책상. 한국에 돌아가면 그런 책상을 하나 들여놓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놓을 자리가 있을지는 또 별개의 문제겠지만.



 아래층 출구쪽 매대로 내려가자 러시아 원문이 인쇄된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책들을 팔고 있었다. 그걸 유심히 보고 있는데 직원으로 보이는 할머니가 말을 걸었다. 엉성하긴 하지만 확실히 영어였다. 어디서 왔냐고 묻길래 한국에서 왔다고 했다.

 “도스토옙스키를 좋아해요?” 할머니가 다시 물었다.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에요” 내가 대답했다. “저도 작가거든요”

 할머니는 “음흠~?” 하는 소리를 냈다. 러시아인들은 그런 소리를 자주 내는 것 같다. “좋네요. 멋있어요. 책 한 권 사가는 건 어떠신지?”

 “아. 괜찮아요” 나는 손사래를 쳤다. “저는 러시아어를 못 읽으니까요…”

 “읽지 않더라도 기념으로 갖고 있으면 되죠!”

 “그런가요?”

 “그럼요~”

 “그렇지만 여기 있는 건 다 읽었어요. 집에도 꽂혀있고요.”

 “아”

 “그럼 저는 가볼게요. 다 스비다냐.”

 “다 스비다냐.” 할머니가 손을 흔들었다. 뒤따라오던 방문객 일행이 매대를 둘러보러왔다.




‘피의 사원’ 이라고 불리는 그리스도 부활 성당이 박물관 가는 길목에 서있었다. 역시 유명한 관광명소라 주변 길목에 잡상인들이 늘어서 있었지만 장사는 시원찮아 보였다. 겉모습은 모스크바에서 본 바실리 대성당과 비슷했다. 바실리 대성당 대신 내부에 잠깐 들어가보고 오자는 생각으로 티켓을 뽑았다.

나는 러시아가 중국 못지않게 금색에 집착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사원 내부의 벽면, 기둥, 아치와 돔 형태 천장에 이르는 모든 곳들이 금색 종교화로 도배되어 있었던 것이다. 보다보면 신앙심이 없는 사람조차 몸이 붕 떠서 하늘로 솟구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사원 내부에 가게를 낸 기념품점, 다른 관광객들이 두리번 거리며 사진찍고 떠드는 소리 같은 것들이 풍선에 매단 추처럼 현실감을 붙들어 맸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심을 흐르는 강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나는 그 옆으로 난 길을 쭉 따라 걸었다. 러시아 국립 미술관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인터넷 예매 쿠폰을 보여주었지만 군인처럼 입은 경비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보였다. 확인한 정보로는 오후 여섯시까지 관람을 할 수 있다고 했고, 지금은 오후 다섯 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차피 한 시간으로는 다 볼 수 없으니 일찌감치 입장을 마감하는 것일까? 어쨌든 그걸로 끝이었다. 러시아 미술관은 영영 볼 수 없게 돼버린 것이다. 나는 아쉬운대로 미술관 건물의 파사드와, 그 앞에 있는 푸쉬킨 동상을 지켜보다가 밖으로 걸어나왔다. 강둑에 위치한 건물 벽면에 ’NO WAR’라고 쓰인 글씨가, 그 위로 보일듯말듯 그어진 X표시가, 그 앞을 서성이며 수군덕거리는 소년들의 모습이 한동안 눈에 밟혔다. 구름없는 하늘 멀리로 또 다시 무언가 날아가는 소리가, 연기로 된 궤적이 무수한 전선과 알 수 없는 건물 뒤로 자취를 감추며 사라졌다.



 오후 여섯 시가 되어 전시장이나 미술관 같은 시설은 전부 문을 닫은 시점이었다. 나로선 일찌감치 숙소로 돌아가 시간을 때우는 방법도 있었지만, 머잖아 떠난다는 생각을 하니 몇 시간이라도 더 둘러보고 싶다는 마음이 강해졌다. 하지만 해가지고 밤이 될 때까지 밖에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어딘가 가서 시간을 때울만한 곳을 알아보아야 했다.

 서커스를 볼까 해서 볼쇼이 서커스장을 찾아갔지만 공연이 없는 날이어서 표를 사지 못했다. 헛걸음에 날은 춥고, 마사지샵 마스터의 말마따나 ‘부츠 같이 굳은’ 발에 통증이 찾아왔다. 벤치에 앉아 발을 까딱거라고 있으니 ‘그러고보니 볼쇼이 극장도 못 가봤었네…’라는 생각이, 또 거기서 ‘발레 공연이라는 걸 실제로 보면 어떤 느낌일까’ 하는 생각에 닿아 주변 극장을 찾아봤다. 우연히도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미하일로브스키 극장이라는 곳이 있었고, 삼십분 뒤 ‘스파르타쿠스’ 공연이 시작할 예정이라기에 급하게 달려가 표를 끊었다. 무대가 작게만 보이는 삼층 사이드 자리였는데도 좌석값이 삼천루블이었다.



나는 한국에서도 뮤지컬이나 오페라 공연을 보러 극장에 가본 일이 없다. 일단 표값이 비싸기도 하거니와, 돈많고 우아한 인간들이 풍기는 특유의 분위기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한 번은 경기도 모 신도시에 있는 아트센터 같은 곳에 강연을 하러 간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곳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여유로움이며 조각된 태도 같은 것들에 적응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한편 미하일로브스키 극장의 경우—이것은 내가 지갑사정이 여유롭지 않은 3층에 있어서였는지는 몰라도—몹시 서민적이고 캐주얼한 느낌이 있었다. 각자 나름대로 깔끔하게 입고 오기는 했어도 그리 격식을 차리는 느낌은 아니다. 발레가 멋지고 훌륭한 문화라는 데에는 동의하는데, 일반대중과 그리 동떨어지거나 ‘돈깨나 있는 사람들이나 보는 것’이라 생각하진 않는 듯했다. 그들에게 발레란 우리나라 사람들이 주말마다 사거리 영화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 같은 수준의 무게감은 아닐까.

 공연은 재미있었다. 스파르타쿠스라고 하면 로마 제국에 반기를 들었다가 처형당한 용병대장의 이야기다. 나는 스탠리 큐브릭 버전의 영화로 본 적이 있어 대략적인 줄거리를 알고 있었는데, 여기선 등장인물의 대사가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 관람에 큰 도움이 됐다. 서커스까지는 아니어도 온 몸의 관절을 기형적으로 뒤틀고 꺾는 기예가 놀라웠고, 무대 아래에 숨어있는 오케스트라가 바쁘게 악보를 넘기며 연주를 이어가는 모습을 흥미롭게 봤다. 그래도 시간사정상 다 보지는 못할 것 같아서, 도중에 빠져나와 해가 진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심을 가로질러 걸었다.

해가 져셔일까, 저녁때가 되어서일까. 이른 오전의 휑했던 그 도시가 맞나 싶을 정도로 골목골목이 붐비기 시작했다. 나는 러시아 노래를 부르며 버스킹을 하는 러시아 밴드를 보았고, 그 주변을 둘러싸 머리를 흔들거나 춤을 추는 행인들을 보았다.

넵스키 대로에 있는 Literary Cafe는 푸쉬킨이 결투에 임하기 직전 마지막 식사를 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크라스노야르스크에 있던 당시, 푸쉬킨 시집을 본 나탈리야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면 한 번쯤 들러보라’고 했던 곳이었다. 입구에서부터 푸쉬킨의 생전모습을 본딴 조형물이 있어서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건물은 오래 됐지만 가게는 평범한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푸쉬킨이 죽은 해가 1837년이었으니까, 이백년 가까이 똑같은 건물과 카페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메뉴판에는 푸쉬킨이 마지막으로 먹은 음식, 디저트 같은 것들을 표시해 세트로 팔고 있었다… 나는 푸쉬킨이 조금 불쌍해지기 시작해서, 그렇게 표시된 것들만 빼고 다른 먹을만한 메뉴들을 골라 식사를 하고 나왔다. 딸기 쉐이크가 맛있었고, 카페 분위기는 아랑곳 하지 않고 열정적인 연주를 하다가 들어간 노령의 피아니스트가 기억에 남았다. 재즈 위주의 선곡 때문에 뭐랄지 라라랜드의 라이언 고슬링이 떠오르기도 했다.


 나는 숙소로 돌아와 일찌감치 짐을 싸기 시작했다. 경험상 다른 나라로 넘어간다는 것은 언제나 생각 이상으로 까다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우선 예르미타시 미술관에서 사온 그림은 간신히 캐리어 가방에 쑤셔넣을 수 있는 크기였다. 캔버스에 프린팅을 한 것 뿐이기 때문에 출입국 심사에 걸리거나 할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다음은 인터넷. 쓰던 러시아 번호에 신나서 오백루블을 충전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진짜 엊그제였다— 이제는 유심칩을 빼고 단기 국제로밍 요금제를 써야 했다. 그것도 별탈없이 핀란드에 도착했을 때에나 유효한 걱정이겠지만.


 ‘아무래도 지뢰가 너무 많단 말이야’ 나는 늦은밤, 남아있던 루블을 모두 내고 발 마시지를 받으며 생각했다. 마스터는 전날보다 힘이 더 들어간 느낌이었다. 생각이라도 하지 않으면 아킬레스건과 함께 비명이 터질 것 같았다.  ‘…버스를 타고 다른 나라로 간다는 것부터가 말이야… 여권심사는 어디서 하는 거지? 헬싱키에 도착해서 그쪽 터미널에서 하나? 터미널에서 입국 승인을 못 받으면? PCR 검사 결과지를 요구하는데 오전 중으로 결과가 안 나왔다면? 아니면 나왔는데 또 다시 양성이 나온다면…?’

 그렇게 되면 기껏 잡은 비행기도 취소해야할 지 모르고(환불 안됨) 러시아로 다시 돌아와야할지도 모른다. 그 시점에서 실업급여 같은 건 완전히 날아가버리는 것이고… 그걸 넘어서 대체 어떻게 집으로 갈 것인지도 처음부터 다시 고민해야할 테다.

…아무리 고민해봐야 가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다. 가장 편리하면서 불안한 논리다. 나는 자정쯤 숙소로 돌아와서, 새벽답에 버스터미널로 가는 길을 재차 확인한 다음 짧게나마 눈을 붙이고자 침대에 누웠다. 아,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은 너무도 가깝고, 먼 어느 때로 정해져 있는 것 같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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