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중성자 Feb 26. 2024

화가 치밀 때, 눈을 들어 앞을 보라

[오늘도 한 뼘] 진상이 되지 않는 법

1. 

적성검사 기간이 되어 운전면허증을 갱신했다. 요즘 면허증은 뒷면이 영문으로, 모바일 신분증 등록이 가능한 IC카드 형태로 나온단다. 너무 오랜만에 새 신분증이 생긴다니 새삼 두근거렸다. 갖고 있던 증명사진을 폰으로 찍어 도로교통공단 앱에 업로드를 하고, 앱카드로 발급비를 결제했다. 매번 느끼지만 세상이 참으로 편리해졌다. 


2.

평일 오후의 경찰서는 한산했다. 낡은 면허증을 건네주고 새것을 받아 드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아니 사진이 왜 이렇게 나왔대요?!" 검은 테두리가 둘러진 채 가로로 길게 늘어난 흐릿한 증명사진 이미지가 반짝이는 새 면허증에 볼품 없이 박혀 있는 것이다. 내가 폰으로 찍은 사진이미지(나름 정성스럽게 찍었다)를 편집 없이 그대로 구겨 넣은 것 같았다. 이럴 수가. 사람이 만드는 게 아니라 프로그램이 자동으로 면허증을 찍어내는 시스템이란 말인가. 경찰서 담당자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그 정도면 사전에 전화가 한 번쯤 왔을 텐데 이상하네요"라며 절차를 의심케 하는 말을 했다. 발급 절차는 운전면허시험장에서 이뤄지니, 그곳에 알아보라고 했다. 


3.

면허시험장에 전화를 하자 담당자가 더 황당한 소리를 한다. 사진 사이즈가 아예 안 맞거나 하면 사전에 전화를 하지만, 이 정도면 제작이 가능해서 그냥 만들었다는 것이다. 세상에, 기계가 아니고 사람이 만든 것이 맞았다. 1~2초면 검은 테두리 정도는 걷어낼 수 있는 걸, 그냥 그대로 박아 넣은 것이다. 비율도 안 맞게, 대충. 10년 간 써야 하는 남의 신분증을 어떻게 이렇게 성의 없이 만들 수가 있단 말인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최대한 차분하게 말하려고 애쓰면서 재발급받고 싶다고 의사를 전했다. 원본사진을 갖고 면허시험장을 직접 방문하면 즉석에서 다시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재발급 비용은 안 받겠다고도 했다. 나는 바로 출발할 테니 30분 뒤에 보자고 했다. 소리를 지르진 않았지만, 아마도 나의 분노는 충분히 전달되었을 것이다.  


4.

운전을 해서 그곳으로 달려가면서 상황을 곱씹어보았다.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이렇게 대충 일처리를 하는 행태로 인해 내가 추가로 시간과 비용을 들여야 하는 것도 화가 났다. 그냥 재발급만 받고 나올 수는 없다, 제대로 민원인으로서 불만을 표시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충고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최대한 진상이 되지 않도록 화를 내지르지 말고 차분하게. 운전대를 잡고 담당자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선생님, 실수로 이런 일이 벌어졌거나 기계가 처리한 일이라면 제가 이렇게 화가 나진 않았을 겁니다, 사람의 손이 한 일이고, 알고서도 일부러 이렇게 일을 처리하셨다는 게 너무 황당한 겁니다, 테두리 걷어내고 비율 맞추는 거 1분도 안 걸리잖아요,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민원인 대상으로 일하는 분이 그렇게 성의 없이 일처리를 하면 어떡합니까, 입장 바꿔 생각해 보세요, 10년 동안 들고 다녀야 하는 신분증인데, 이런 사진이면 선생님 같으면 기분 좋겠습니까, 왜 상대방 입장에서는 생각을 안 하시는 겁니까, 이 정도면 괜찮다니, 사람들이 불만이 있어도 그냥 시간 아깝고 에너지 아끼려고 참는 거지 좋아서 말 안 하는 거 아닙니다, 저도 실수였다면 그냥 넘어갔을 거예요, 앞으로는 이런 식으로 일하지 마세요, 이 일이 싫으면 다른 사람과 일을 바꾸시던가요... 까지 했다가 아 이건 너무 나갔군, 하며 수위를 조절했다. 너무 길다, 딱 두 문장만 말하면 좋겠는데. 어떻게 말해도 그 사람은 기분이 나쁘겠지, 하지만 이건 너무 심했어, 난 꼭 한마디 해야겠어, 모르는 건 몰라도 대충 하는 건 못 참아. 


5.

부글부글하면서 면허시험장에 도착했다. 가까스로 빈자리를 찾아 주차를 하고, 건물로 들어섰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헉, 숨을 들이켰다. 


여기가 원래 이렇게 복잡하고 사람이 많은 곳이었나. 면허시험장 민원실에는 6개의 접수창구를 두고 수십 명의 사람들이 공간을 가득 메운 채 웅성이고 있었다. 띵동띵동, 번호표 뽑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고 여기저기서 이름을 불러댔다. 아주 어려 보이는 학생들부터 머리가 새하얀 노인, 외국인, 양복 입은 사람과 먼지가 잔뜩 묻은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까지 우리에게 운전면허가 얼마나 보편적인 생활수단인지가 새삼 느껴졌다. 창구 직원들은 정신이 없어 보였고, 창구 뒤편에 관리자로 보이는 사람들도 부산하게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복잡한 곳에 와서인지 멍하게 이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나도 모르게 뭔가를 수긍하고 있었다. 그래... 이 정도로 정신없는 곳에서 일하면 사진 이쁘게 잘라서 붙일 생각을 못할 수도 있겠군... 그래... 그럴 수 있어... 그래... 화가 잦아들고 뭔가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 스며들었다.


창구로 다가가 세상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면허증 재발급한다고 전화했던 사람인데요.. 사진 원본 가지고 왔습니다.." 담당자는 나의 예상을 뛰어넘는 상냥함으로 답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지금 전산에 문제가 있어서 재발급 시간이 조금 걸릴 수 있어서요, 죄송해요" "어머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오래 걸리면 근처에 있을 테니 전화 주시겠어요?"


6.

30분 넘게 걸릴 거라고 했던 재발급 업무는 생각보다 신속하게 처리되어 나는 금방 새 면허증을 받을 수 있었다. 2만 원이나 주고 찍은 여권사진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박혀 있는 반짝반짝한 최신 면허증. 보자마자 마음도 반짝반짝해진 나는 세상에서 가장 환한 미소로 "감사합니다!" 90도 인사를 하고 민원실을 나왔다. 휴우, 하마터면 성급하게 애먼 사람의 기분을 망칠 뻔했군. 사람이 바쁘면 그럴 수도 있는 건데, 내가 너무 나만 생각했군 그래. 나란 사람, 화가 많고 참을성이 없어서 정말 큰일이야. 


7.

이 글의 결론은 나의 역지사지에 대한 반추가 아니다. 사실은 담당자가 친절해서 정말 다행이었고, 그가 만일 바쁘다며 면허증 사진을 바꿔주지 않았거나, 발급비용을 추가로 내라고 했으면 나의 친절도 산산조각 났을지 모를 일이다.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얄팍하고 단순해서, 결과적으로 반듯한 사진이 제대로 들어간 새 면허증을 받았기 때문에 지금의 나는 평화로운 마음으로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것이다. 아니었다면... 상상조차 하기 싫다. 만약, 내가 먼저 화를 내며 진상 민원인 행세를 했더라면 상황은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원하는 결과물은 얻었을지 몰라도 그와 나의 하루는 만신창이가 되었을 것이다. 


늘 느끼는 사실이지만, 일단 잘 참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에는 화를 내게 되더라도, 일단 화를 낼 상황인지 아닌지 먼저 상황을 관찰해야 한다. 그러니까 오늘의 나는 잘 관찰했고, 참았고, 좋은 사람을 만났고, 마음에 드는 신분증을 얻었다. 결론. 이 정도면 오늘의 나 칭찬해, 훗훗.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