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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중성자 Jul 13. 2017

지역과 청년을 위한 정책은 없다

         

  

2016년 봄, 전라북도 전주의 청년활동가 몇몇이 모여 전주시에 거주하는 19세~39세 청년 1000여 명을 대상으로 전반적인 생활실태와 정책수요에 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 전주지역 대부분의 청년들이 ‘고비용과 미래불안’을 경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구체적인 정책요구를 한두 가지 사안으로 추려내기는 어려웠다. 20대와 30대라는 제한된 연령 범주 안에서도 거주지역, 나이, 성별, 고용상태, 결혼 여부, 학력 등에 따라 어려움을 느끼는 분야와 수준이 그야말로 천차만별이었기 때문이다. 


이  분석표는 지역 내에서, 혹은 전국 각지에서 살아가는 청년들의 일상적 격차와 욕구의 다양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청년의 삶은 결코 단일하지 않다.


20대 청년 아무개의 시간들 : 경쟁, 고립, 혹사, 그리고 자괴감 


나는 지역 내, 지역 간 교류와 학습의 장을 마련함으로써 민간 청년주체 역량을 높이고 전문적인 청년 연구를 통한 정책 수립과 제도 개선을 꾀하느라 매우 바쁘게 활동하는 지역의 청년활동가다. 하지만 직장에 소속되어 있지 않고, 고정적인 경제활동이나 구직활동을 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나의 사회경제적 처지를 아마도 ‘비구직 니트 청년’, ‘1인 가구 청년’ ‘무주택 세입자 청년’, ‘고학력 비혼 여성 청년’ 등 문제적 대상으로 명명할 것이지만, 나는 내가 매우 보편적인(물론 다른 방식의 보편적 삶 또한 많이 있을 것이다) 사회적 가치관에 따라 청년기를 보내온 평범한 청년인 동시에 그나마 여유를 갖고 삶의 방향과 방식을 고민하고 선택할 수 있었던 운이 좋은 청년이라고 생각한다.      


전라북도의 시골에서 자라 인 서울에 성공한 나는 전형적인 지방 출신 도시 청년이었다. 취업전쟁을 피해 대학 졸업 후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으나 사회적으로 고립된 채 스스로 피 말리는 수험생활에 지쳐 2년 만에 나가떨어졌다. 뒤늦게 구직활동을 시작했을 때는 이미 신입으로도, 경력직으로도 취업하기 어려운 상태가 됐고, 무엇보다 그 많은 구인구직사이트에 내가 ‘원하는’ 일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정부에서 제공하는 구직청년 교육프로그램은 재미도, 성의도 없었다. 몇 번의 인턴생활 끝에 간신히 방송국의 프리랜서 작가가 되었을 때, 나는 그제야 그럴듯한 사회적 소속을 가진 전문직이 된 듯한 자부심과 만족감을 얻었지만, 퇴근을 거의 못하면서 최저임금도, 4대보험 보장도 못 받는 고강도 비정규직 노동으로 인해 나의 심신은 3년도 채 안 되어 망가졌다.      


고민 끝에 서울생활을 내려놓고 고향에 왔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편안함이 아닌 ‘열패감’이었다. 좀 더 끈기 있게 서울에서 버티지 못했다는 생각, 투지 있게 경쟁사회로 뛰어들지 못했다는 생각, 그동안 들인 노력과 비용이 아깝다는 생각 등등. 그런데 나는 도대체 누구를 위해 무엇으로 싸워서 어떤 성취를 이뤄내려고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왔을까? 10년 넘게 서울에 살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고 소소한 성취와 일상적인 즐거움도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왠지 그것은 내가 덜 괴롭기 위한 자기 위안, 정신승리인 것만 같다. 나의 20대는 그저 괜찮은 일자리 하나 얻기 위한 투쟁의 시간, ‘구직난’에 불과했던가.      


지역에서 청년이 살아가는 법 : 떠나거나, 요구하지 않거나


지역(서울과 수도권이 아닌 중소도시와 농어촌 지역을 통칭)과 서울에서 살아가는 방식은 어떻게 다를까? 집, 인간관계, 안정적인 직장과 소득 등 기본적인 자산이 있어야만 어쨌든 큰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일상의 디테일은 크게 다르다. 지하철, 24시간 편의점, 패스트푸드 등 집약된 산업-자본 인프라에 익숙한 사람이 지역에서 살려면 모든 것에 대한 상식과 습관을 바꿔야 한다. 임대료를 포함한 대부분의 물가가 조금씩 낮은 것과 비례하여 소득, 임금 수준도 턱없이 낮으며(초임이 120만 원 미만인 곳이 널렸다) 생산규모와 재정자립도가 떨어지는 탓에 근로환경도 매우 열악하다. 교통이 불편하므로 자가용이 없는 이상 장거리 출퇴근이 어렵다. 드물게 생기는 괜찮은 일자리는 실력 경쟁보다는 지인의 소개를 통해 이뤄지는 경우가 많고, 사업장의 규모는 대부분 영세하다. 따라서 청년에게 고용자와 근로조건을 다툴 수 있는 협상력과 조직력이란 없다. 욕구 수준이 높은 청년들은 대도시나 산업시설이 있는 곳으로 떠나고, 남은 청년들은 직장, 사회, 정부 등에 목소리를 드러내지 않고, 얻을 수 없는 것은 원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욕구가 없는 게 아니라,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 

(*2016전주청년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68%가 뭔가를 포기하고 살아간다고 했다. 내 집 마련(34.1%)>꿈/희망(29.4%)> 결혼(29.0%)> 연애(25.4%) 순서다. 결국 삶의 안정된 보금자리와 미래, 사랑을 포기하고 사는 셈이다. 또한 전주시 청년들의 평균소득은 140만 원 수준이었으나, 연애/결혼/출산 등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월소득은 평균 305만 원 정도라고 응답했다. 이 결과는 사회경제적 계층에 상관없이 일관된 응답으로 드러났다.)


과소 대표되는 청년세대의 정치사회적 지위 문제는 지역사회일수록 훨씬 심각한데, 청년층의 현실적 요구가 제도와 정책 등으로 실현된 경험이 지역사회에서는 거의 전무하다. 물론 그렇다고 지역에 청년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 전라북도에는 엄연히 45만여 명, 전국적으로는 약 760만 명의 청년이 서울/경기를 제외한 지역 곳곳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곧 현재와 가까운 미래 ‘지방’의 생산가능인구다.  


‘지역 맞춤형 일자리’에 지역과 청년이 없다


통계청의 ‘국내인구이동통계’에 따르면 전라북도의 청년층 인구가 2000년대 이후 매년 1~2만여 명씩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가장 큰 전출 이유는 물론 ‘직업’이다. 청년들의 욕구조사를 해보면 대부분 ‘일자리’를 먼저 말하는 게 사실이기는 하다. 전주에 살면서 진로를 계획하는 2030 청년의 80% 이상이 취업을 준비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이 원하는, 혹은 그들을 모두 고용할 수 있는 지역의 사업장은 없다. 그래서 지역 청년들 중에서 떠나지 않고 남은 대졸청년들은 서울과 마찬가지로, 미래의 안정을 기대하며 현실의 불안을 일상에 갈아 넣는 ‘공시생’이 된다. (전주시 청년의 30% 정도가 고졸임에도, 대부분의 지역 일자리는 대졸 또는 경력직을 선호하고 대졸 청년은 공시를 준비하거나 지역을 떠난다. 일자리 미스매칭은 지역에서 훨씬 심각하다)      


‘일자리’가 없는 게 문제이니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내면 되지 않을까? 지역의 청년들도 공무원이 되고 싶어 한다니까 공공일자리 수를 대거 늘리면 어떨까?(그런데 무슨 수로?) 매출 규모가 큰 대기업 산업단지에 투자를 확대하면? 전형적인 대도시 구직청년 대상의 취업 강제 정책 프레임은 지역에서도 매우 강력하게, 더욱 일방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미안하지만 지역에서, 특히 전라북도처럼 농업 생산 비중이 높고 고령화가 이미 심각한 지역은 대규모 일자리 창출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중앙정부와 지자체에서 자주 애용하는 ‘맞춤형 일자리’는 사실상 청년에 일자리를 맞추는 게 아니라 청년고용을 일방적으로 산업 규모에 맞추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청년들에게 일률적으로 기술을 가르쳐서 주거지를 강제로 이동시키지 않는 이상 그런 계획이 성공할 가능성은 없다. 청년들은 지역 내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육성된 ‘산업 맞춤형 노동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부 주도의 ‘일자리 00개’ 같은 정책이 전라북도 같은 도농복합지역에서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지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이유다. 청년이 원하지 않는 일, 청년에게 필요하지 않은 자리가 만들어진다고 한들 그곳을 채우는 건 결국 발등에 불이 떨어진(저소득과 채무 등으로 하향 취업하는) 청년들이거나 혹은 이주 노동자일 것이다. 그런 방법으로는 떠나는 청년들을 막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역 청년의 노동현장을 더욱 처참하게 만든다.      


이제는 질문을 바꿔야 : 지역과 청년의 ‘현실’에 주목할 것


최근 전국을 휩쓸고 있는 지방 소멸의 공포는 모든 지역사회의 고민이자 숙제일 것이다. 부산, 대구와 같은 노후 대도시도 심각하지만 대부분은 생산가능 인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군, 면 단위 농어촌 지역이 고위험군 대상이다.*  한국사회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한 필수 대책으로 ‘지역격차 해소’, ‘지방분권’ 등의 단어가 구호처럼 등장한 지도 오래다. 하지만 미래를 위한 노동력, 지역 존속을 위한 주인공이라며 청년을 매번 호명하면서도, 정작 빠르게 확산되는 청년 관련 제도와 정책 어디에도 지역 청년의 현실과 상황을 고려한, 지역살이 청년의 정주성과 삶의 안정을 위한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최근 지자체 단위에서 서울시와 중앙정부 정책을 이어받아 시행되고 있는 몇몇 청년정책은 예산 부족 등을 이유로 규모 자체가 매우 협소하고, 그나마도 각종 요건과 요구사항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경우가 많다. 거주지역, 연령, 성별, 가족 구성, 교육 수준, 소득 수준 등에 따라 청년 각각의 입장과 요구는 천차만별로 다양화되는 현실이지만, 정책은 여전히 대학교육, 구직등록, 증빙된 저소득, 혼인 등을 조건으로 내세워 좁은 정책의 틀 속에 청년의 욕구를 구겨 넣길 강요하고 있다. 아마도 대부분의 지역 청년들은 레이저 광선처럼 가느다란 정책의 빛줄기에서 온전히 비껴 서 있을 것이다. 

(*2017년 인구절벽보고서 “한국 지방 40%는 이미 붕괴되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1211738001)


이제는 질문과 관점을 바꾸어야만 한다. 어떻게 하면 취업하거나 돈을 벌 것인지가 아니라 ‘지금의 일상과 삶의 상태가 어떤지, 현실적 어려움은 무엇이고 개선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지역과 청년에게 정확히, 꼼꼼하게 따져 물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청년기본법 등 국가 차원에서의 근거법 마련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고, 이후 실제 정책의 내용을 제대로 채워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역 청년의 현실적 다양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많은 지자체가 지역만의 특성과 비전을 갖춘 청년정책을 원하지만, 지역 정체성이란 지역의 물리적 환경과 주민의 현실과 괴리되어 따로이 존재하거나 위로부터 ‘내려지는’ 것이 아니다. 개개인의 다양한 일상의 요구가 교차하고 수렴하는 지점들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것이 바로 지역의 보편성과 특수성이다. 앞으로 중앙 혹은 지방정부는 지역과 청년의 문제를 종합적이고 입체적인 차원에서 고민해야만 할 것이고, 무엇보다 지역살이 청년의 다양한 현실에 대한 깊이 있는 조사연구가 선행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반드시 정책 설계부터 실행 단계에 이르기까지 당사자의 적극적인 참여가 보장되어야 한다. 청년세대의 문제는 결국 청년이 가장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역의 청년정책이야말로, 향후 지역존립의 문제를 완화하거나 예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해법으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지역 청년정책의 필수요건 : 다양성과 유연성


지역에 애착을 갖고 살아가려는 청년들에게 삶은 어떠해야 할까. 도시에서 혹은 농촌에서, 자신에게 내재된 재능과 가치를 스스로 발견하고 성장하기 위해, 지역사회에 조금이라도 의미 있고 보탬이 되는 삶자리를 꾸려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청년들이 많이 있다. 최근 지역을 필두로 확산되는 청년기본조례와 산발적으로 시행되는 정책사업 틈바구니에서, 주변의 더 나은 삶과 미래세대에 대한 책임감으로 공론의 장을 꾸리거나 지역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 다양한 연결과 실험을 시도하는 청년 주체들도 속속 등장하는 중이다. 앞서 이미 언급하였지만 그들의 요구와 필요를 몇가지로 간단히 추려내어 말하기는 어렵다. 농촌의 청년은 최소한의 소득, 주거와 교통, 문화적 인프라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도시의 청년들은 안정적인 미래를 준비할 시간적 여유와 주거비를 포함한 생활비의 절감, 양질의 근로조건 등을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나를 포함하여 지역살이하는 많은 청년들의 다채로운 요구 저 아래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면, 결국 청년들은 취업을 하든 안하든, 결혼을 하든 하지 않든, 도시와 농촌 어느 곳에 살든, 다양하게 자기 삶을 고민하고 자유롭게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과 공간, 기회와 안전망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청년이 원하는 것은 바로 온전히 나에게 보장되는 내 삶의 선택권이며, ‘일자리’로 수렴되는 (것처럼 보이는) 수많은 청년들의 불만과 요구도 결국 그것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지금은 청년 당사자로서 미래세대를 위한 제도 개선을 위해 활동하지만 조만간 나도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스스로 ‘청년’이라 부르기 민망한 때가 올 것이다. 그때에는 부디 나의 지역사회가, 정부와 정책이 청년에게 좀 더 품이 넓고 안전한, 다양하고 유연한 사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2017. 6. 9




*이 글은 2017년 6월 9일에 열렸던 <청년정책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청년토론회 : 배운대로 사는 세상은 지났다>토론문의 수정원고입니다. 원문이 수록된 자료집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youthunion.kr/xe/pds/188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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