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긋지긋한 '모멸의 시대'를 끝내기 위하여
결국, 청와대에서 서울시 청년수당에 대한 외압지시 문건이 발견되었다.
이전 정부의 국정농단이 3천 명에 가까운 서울 청년들에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피해를 끼쳤다는 사실을 막상 눈으로 확인하니, 참담하기 그지없다.
(관련기사 참고)
http://ojs6.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46077
그동안 청와대의 주인이 바뀌었고 정국은 뒤집혔다. 지난 4월 보건복지부는 서울시와 경기도에서 시행하는 수당 형식의 청년지원 사업에 동의했으며, 고용노동부는 '청년 구직활동 지원수당'이라는 유사 명칭의 정책을 전국화했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보건복지부(전 장관 정진엽, 현 장관 박능후)는 서울시 청년수당 직권취소 처분을 철회하지 않고 있는 모양이다. 당사자 집단의 피해 사실은 여전하고 농단의 증거도 발견되었는데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전 대통령만의 잘못일까? 이는 대통령 한 명, 비선실세 몇 명의 문제를 넘어 대단히 폭력적이고 부당한 어떤 의사결정 '시스템'이 작동한 결과다. 기본적인 질문을 다시 던져본다. 도대체 정부는, 행정부처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이 사태에 대한 책임과 해결은 누가 져야만 하는 걸까. 당연히, 스스로의 이름을 걸고 매듭을 묶은 자, 결재란에 서명한 자와 공식적인 직함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정부를 비롯하여 지금까지 한국사회 대부분의 조직들이 형성해온 가장 대표적인 적폐는 구성원 개인의 인격적 판단과 민주적 합리성을 무시하고 군대식 상명하복을 강요함으로써 '조직노예'를 대거 양산해온 것이다. 70-80년대 군사정권 이래 “까라면 까”는 조직문화는 군인경찰 사회에서만 통용되는 게 아니라 사실상 모든 정부기관, 회사, 단체, 심지어 대학동아리 내에서도 통용되는 사회적인 상식 같은 게 되어버렸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명령을 내리는 사람과 실행하는 사람의 자아가 철저히 하나가 되고, 명령이 타고 내려가는 과정에서 최상위 결정권자 1인을 제외한 모든 구성원이 영혼 없는 '손가락'으로 전락한다. 막상 문제가 터지면 가장 먼저 잘리는 것은 손가락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런 조직 시스템에 익숙한 사람은 쉬이 중간에 인격을 내세우거나 자발적 사유와 판단을 시도하지 않는다. 실행에 도움이 되는 아이디어 외의 ‘질문’은 근본적인 것일수록 기피된다. 설명은 번거롭고 협의는 골치 아프기 때문이다. 조직과 다른 판단을 한다는 것은 누구도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고립감과 그에 비례하는 두려움을 수반한다. 경험자가 아니라면, 그에 대한 공포를 딛고 발생하는 결과를 알아서 책임진다는 것은 너무 무겁고 부담스러운 일이다.
지금은 2017년이지만, 여전히 이런 조직문화가 도처에 횡행한다. 아직도 내 주변 곳곳에서 매우 빈번하게, 직장상사 또는 가족, 주변 선배와 어르신 등의 이해할 수 없는 지시와 고압적인 태도, 그에 대항할 수 없는 조직문화 때문에 심신이 망가져가는 이들을 숱하게 만난다. 이들의 대다수는 물론 청년이다.
잦은 좌절을 경험할수록, 혹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대부분 알아서 자기를 낮추게 된다.(여기서 자기를 낮춘다는 건 겸손해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비판적으로 사유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윗사람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 자신의 안위에 이롭다는 사실을 내면화하고 나면 스스로를 괴롭히던 비판적 자아는 동력을 잃게 된다. 문제는 그것이 사라지지 않고 무의식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가 전혀 다른 장면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는 것인데, 자신보다 사회적 지위가 낮은, 혹은 그러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자신의 의견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때 쉽사리 분노하거나 멸시, 혹은 복수로 되갚는 행동들이 바로 그러하다. 일방적인 의사소통에 익숙하고 자기모멸을 오래 거듭해온 사람일수록 이러한 열등감을 자주, 강하게 표출한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그리고 뇌의 크기가 작은 여타 동물과도 다르다. 두뇌에 주름이 잡히고 '정체성'이 자라나는 순간부터 사람에게는 자기존중감(편의상 이하 '자존'이라 표현하겠다)을 확보하려는 욕망이 강하게 발현하기 시작한다. 뇌 용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뇌에서는 좌뇌와 우뇌를 통해 끊임없이 이성과 감정이 교차하고 교감한다. 개인의 합리적 사고와 판단이 배제되는 환경에서는 대체로 동물성에 가까운 욕구와 감정이 더 활성화되는데, 지시와 명령이 흐르는 곳에는 필연적으로 강요와 모멸이 흐르고, 복종이 향하는 방향으로는 맹목적인 성취와 동일시를 통한 쾌감 내지는 낙오에 대한 두려움이 작동한다. 그 기저에는 자기부정과 약자혐오가 있다. 상명하복식 구조가 강할수록 조직 내에서는 획일성이 요구되고, 소수와 약자는 배려가 아닌 배제의 대상이 된다. 조직적 자아로서의 안위, 소속감이 주로 활성화되면 그 틈에서 개별적인 자존과 명예, 반성과 수치, 책임감 등은 살아남기 어렵다.
그렇다면 인간적인 차원에서 그런 조직적인 책임 회피가 용인되어야 할까? 천만에 말씀이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개별의 삶을 감당하고 살아갈 자유와 권리가 있는 자연인이지만, 우리가 개인을 넘어서 ‘조직’을 만들고 ‘사회’를 형성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다수의 삶에 관여하고 그것을 책임지는 것을 존재 목적으로 하는 정부와 회사, 특히 공익을 위해 물리적 강제를 행사하는 권한을 가진 국가와 공공기관이라면, 당연히 어떠한 결정과 그에 따른 결과에 대한 공식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그들이 작성하고 결재하는 서류 한 장이 수백 만, 수천 만 명의 삶을 쥐고 흔든다. 얼마나 무겁고 무서운 책임을 지닌 자리인가. 정부에 몸담고 있는 공직자 개개인에게 권한에 상응하는 공직 윤리가 요구되고 정년 보장이 주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따라서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은 개인에게도, 조직적으로도 합당하지 않다. 공직에 있는 누군가가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곧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정부, 그리고 그곳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은 조직원이기 이전에 누구보다 법령을 준수하는 공적 주체이자 상식과 사회윤리를 따르는 시민이어야 한다. 이전 청와대의 개입은 합법적인 명령체계를 따른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부처의 수장, 혹은 그 아래 결재권자는 최소한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거나 비판적으로 사고함으로써 상위법을 준수하는 태도를 지켰어야 했다. 조직의 결정 내지는 상부의 명령이라는 말에 인격과 자존을 함몰시키는 태도는 더 이상 지지되거나 옹호되어서는 안 된다. 모두가 가해자가 되고 동시에 피해자가 되는 무서운 상황을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냉소해서는 안 된다.
문재인 정부의 100대 정책과제 중 1호가 '적폐의 철저하고 완전한 청산'이라고 한다. 나와 같은 평범한 시민, 일상을 살아가는 사회구성원의 입장에서는 지금까지의 정부와 공공기관의 강압적인 지시전달 체계, 위계적이고 모멸적인 조직문화가 곧 적폐이고 혁신대상 1순위다. 우리 사회 깊숙이 곳곳에 파고든 이런 폭력적인 조직적 강요와 만연한 책임 회피, 노예적인 태도를 바꾸어 내려면 가장 먼저 정부가 책임 있게 혁신에 나서야 한다. 잘못된 선택, 그에 따른 잘못된 결과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책임자를 징계하며 후속대책을 마련하는 것은 그야말로 기본 중의 기본이다.
블랙리스트 문건에 대한 조윤선 전 문체부장관의 무죄 판결에 대해 전국민적인 항의가 거세다. 행정부처의 장으로서 청와대의 부당한 개입/지시/외압 등에 대해 영혼 없이 순종하는 행위에 법원이(혹은 특정 판사가) 여지없이 면죄부를 준 사례다. 이제 우리 사회가, 우리 개개인이 바꿔내고 맞서 싸워야할 가장 크고 무서운 대상이 무엇인지, 가장 무거운 숙제가 무엇인지 명백히 그려지는 것 같다. 그것은 개인의 자존과 인격의 회복이며, 동시에 스스로의 결정과 행동에 대해 책임지는 태도이다.
서론이 길었다. 그러니까 보건복지부는 책임있게 사과하고 하루 빨리 대책을 세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