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나의 작은 신앙고백
어릴 때, 나는 성당 벽에 걸려계신 십자가 예수님이 너무 무서웠다. 내가 어린 시절 다닌 성당은 적벽돌로 지어져서 매우 오래된 성당이었고, 지금은 결국 건물의 위험진단을 받아 옮겨진 곳이다. 그 벽돌 앞 제대 뒤에는 너무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이 생생한 십자고상이 걸려있었다. 성삼일 때, 정말 시뻘건 붉은 벨벳 같은 천으로 그 고상을 가려두었다. 휘장이 찢어질 때 그 연출까지 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그래서 사순시기는 더욱 무서운 시기였다. 게다가 예수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시다니, 이건 너무 무서운 일이었다.
다시 시간을 조금 바꿔보자. 유아세례를 받고 성당을 꾸준히 다니다가 성당 공동체에서 많이 상처를 받고 2년 정도 냉담을 하던 내게 엄마는 뜬금없이 ‘우주가 다시 성당을 다녔으면 좋겠다’라고 이야기를 했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바로 성당을 가긴 무섭고 해서 학교에 청년성서모임이라는 게 있던데 그걸 한번 해보고 그 이후에 성당을 갈지 말지 선택하겠다고 말을 하고 학교로 가서 성서모임을 시작했다. 하반기 성서모임을 시작하고 두 달이 겨우 지났을 때, 엄마가 죽었다.
나는 하느님이 너무 미웠다. 엄마는 본인이 아프고 힘들 때 내내 기도를 하면서 그 마음을 잡던 분이었다. 그런데도 결국 엄마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 그걸 그냥 보고만 계신 저 십자가에 달린 무능한 예수님이 너무 미웠다. 그런데 또 성당에 갔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신 게 엄마 마지막 부탁처럼 되어버리니까 또 안 갈 수도 없었다. 그리고 내 봉사자는 그런 나를 정말로 물심양면으로 케어하고, 마음을 놓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연수까지 가게 되었다. ‘예수님의, 우리의 미사’ 성가는 더욱 화가 났다. 왜 내가 힘든데 미사를 떠올려야 하는 거지? 하느님은 다 알고 계신다고 하면서 내가 예수님의 고통까지 생각하면서 예수님이 힘든 걸 생각해야 하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고 묻히셨다가 다시 부활한, 그 십자가 상 제사의 재현이 미사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내가 예수님처럼 그렇게 할 수도 없고 할 자신도 없는데, 왜 내가 고통 중에 예수님을 기억해야 하지? 고통의 소리가 가장 높이 올라간다니! 그런데 왜 내가, 또 우리 엄마가 고통스러워할 때에는 옆에서 손을 잡아주시지 않았지? 하면서 하루종일 이 성가를 생각했다. 곱씹고 또 곱씹으면서, 대체 왜 이 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하면서.
우리는 삶 안에서 하느님같이 살지 못한다. 작은 일에도 화가 날 수 있고, 저 사람을 너무 미워할 수도 있고, 내가 너무 미울 수도 있고, 하느님이 너무 미울 수 있고, 학교에서나 일터에서나 너무 힘들 수도 있고. 그 삶 안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이시고,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성령이시다. 특히나 매 미사 안에서, 예수님은 끊임없이 성체성사를 통해 다시 제대 위에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 제물로 바쳐진다. 그때 이미 저의 고통과 아픔을 모두 아시는 예수님이 미사를 통해 다시 한번 제물로 바쳐지시는 거라는 것을, 그렇기에 그 미사는 예수님의 미사이자 우리의 미사이기도하다는 것을. 그때서야 비로소 예전에 교리선생님이 말씀하셨던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돌아가셨다는 그 말, 그리고 항상 나를 위해서 함께 하신다는 그 말이 내 안에서 하나로 합쳐졌다.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걸 아는 내 마음이 희미해지더라도, 예수님은 미사 안에서 십자가에 제헌되시고, 나를 위하여, 또 나의 고통을 위하여 희생 제물이 되신다는 것을, 매주 매 미사 때마다 느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예수님께 나의 고통과 역경이 드리는 봉헌이 된다는 것. 그리고 그 자체가 예수님과 나의 미사라는 것.
말할 때마다,
그것이 제 생애의 마지막 말인 듯하게 하소서.
행동할 때마다,
그것이 제 생애의 마지막 행위인 듯
행하게 하소서.
고통을 겪을 때마다,
그것이 제가 당신께 드리는
마지막 봉헌인 듯이 감수하게 하소서.
기도할 때마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당신과 나누는
마지막 대화인 듯이 몰입하게 하소서.
“내 영혼을 위한 3분 - 키아라 루빅의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