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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 May 05. 2023

시작했으니, 두려움 없이

지역시민단체 활동가의 어쩌다보니 퇴사일기


2022년 7월 30일, 퇴사를 했다.


지역에 와서 2년 만에 얻은 직장이었다. 20대부터(!) 시민운동을 한(!!) 서울에서 대학을 나온(!!!)의 결혼 적령기(!!!!)의 나는 잘 팔리는 시장상품이 아니었다. 상품은 그렇게 진열대에서 낡고 부스러지면서 스스로 녹슬면서도 그럼 그렇지, 하고 그냥 체념하고 있었다. 결국은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서울을 찾아다니면서 교육을 듣고, 그 이후에 찾은 직장은 어쩌면 적당히 살기에는 너무 좋은 곳이었을 수도 있다. 시민단체라는 기대, 지역에서 끊임없이 생존해왔다는 것만으로도 나의 기대를 충분히 가져가기에 마땅한 곳이었다. (물론 여전히 그곳을 좋아한다. 그곳은 그래도 유일하게 내가 이 지역 안에서 숨통을 틀 수 있는 곳이다.


지역은 굉장히 여러 결의 복합적인 직조다. 씨실을 놓는다고 날실을 놓아버리면 안 되었다. 이곳에서 나는 ‘청년’, ‘여성’, ‘비출산기혼’, ‘서울에서 온 활동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고 수행하는 사람’의 모든 실을 나 혼자 꿰어야 했다. 저 모든 것을 한 사람이 하기에는 버거웠다. 그리고 이 일을 함께 해 주리라고 믿었던 활동가들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듯 멀리서 보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직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 내가 열심히 하면 바뀌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함께 있었다. 그게 공동체고, 그게 시민단체라고 생각했다.


© sergiogonzalez2024, 출처 Unsplash


그리고, 코로나가 왔다. 거기에 나는 ‘요즘 디지털 세대(!!!!)’가 추가되었다. 모든 것을 하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다. 나 혼자 열심히 앞서서 직조를 하면 다른 사람들이 나와 함께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두 베틀을 앞에 두고 아무도 실을 걸어주지 않았다. 처음부터 실은 나 혼자 걸었던 것이다. 열심히 씨실과 날실을 엮고 있었지만 결국은 그들과 나는 엮일 수 없는 다른 직물을 짜고 있었다. 나는 이게 결국 다른 모습으로 서로 얽혀 큰 태피스트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짜는 베틀은 훨씬 더 견고하고 단단하게, 내 옆에 따로 존재했다. 아, 처음부터 나는 실을 잘못 꿰고 있었구나. 그걸 알게 된 순간 나는 내 손을 멈추기로 했다. 더 이상 이 직물을 짤 수는 없었다. 그걸 포기하는 날, 나는 퇴사하기로 마음먹었다.


퇴사한 나는 활동가도 무엇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때, 다른 단체의 활동가였던 벗이 나에게 말했다. 이 지역에서, 여성주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그곳에 없었다고. 청년여성으로 이야기를 내어주고, 비출산기혼으로 사는 삶을 나눠준 사람은 너였다고. 괜히 타 기관에서 연대활동을 할 때 너를 콕 찍어서 부탁한 게 아니라고. 다른 사람들은 이미 이 지역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너를 부른 거라고. 너는 ‘여성주의 활동가’라고 너를 정체화해도 된다고. 나는 내 직조를 내 손으로 잘라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나의 직조는 다른 세계들과 연결해서 더 확장되고 있었다.


© anigmb, 출처 Unsplash


퇴사를 한 이후에도, 어떤 기관 소속 활동가가 아닌 그저 ‘여성주의 활동가’라는 이름으로 지역에서 몇몇 행사들을 치르고 원고를 썼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거라는 다짐을 담아 대학원 입시를 했고, 이제는 새롭게, 그리고 조금 더 확실하게 척척석사가 될 예정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나를 반겨주는 사람들, 나에게 기회를 주는 사람들을 만났다.


퇴사를 하면서 내가 내 손에서 버렸다고 생각했던 이야기들을 주워 다른 이들이 보관해주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없어져도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들이 보관해 준 이야기가 또 다른 나의 시작이 되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다시 나의 이야기와 너의 이야기로 만들어보고 싶다. 시작했으니 두려움 없이. 아이러니하게도 이 말은 이전 직장에서 들었던 가장 인상적인 캐치프레이즈였다. 이만큼 끝과 시작을 알려주는 말이 없지 않을까.





2022년 7월 30일, 퇴사를 했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시작을 한다.

시작했으니 두려움 없이, 나는 올해도 직조를 짠다.

내 베틀에 실을 걸어주고, 떨어진 조각들을 잡아주는 이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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