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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형식 Mar 06. 2022

아버지는 세 번 다녀가셨다

나는 그 시절이 그립지 않다.

첫번째
아주 어린 시절 그나마 우리 집이 살만 하던 때 오늘처럼 비 내리던 날이었다. 수업 시간에 문득 창 밖을 보았더니 엄마들이 우산을 들고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호기심 많은 엄마들은 교실 처마 밑 창문까지 바짝 붙어서서 흡족한 표정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는 갓 입학한 병아리 국민학교 일학년들이었다. 수업이 어수선해지고 아이들이 창쪽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창 밖의 엄마들 어깨 너머로 멀찍이 키 큰 남자 한 분이 혼자 서있었다. 이럴 수가! 우리 아버지였다. 

"아, 우리 아부지다."

나에게 아버지는 조심스럽고 힘든 분이셨다. 줄줄이 동생이 있는 장남이라 언제나 점잖아야 했다. 밖에서 친구들과 놀때는 못 말리는 개구쟁이였지만, 아버지 앞에만 서면 고양이 앞에 쥐처럼 납작 엎드렸다. 손아래 동생은  '아부지야!' 라고 했다. '엄마야!' '누나야!' '친구야!'처럼 친근하게 부르 수 있는 '야'를 아버지에게도 붙였다. 아버지는 허허 웃으시며 '오냐!' 라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꿈도 못 꿀 호칭이었다. 난 언제나 '아부지예!'라고 했다. '선생님예!'  '아저씨예!' 처럼. 그런 '아부지'께서 손수 우산을 들고 학교까지 오시다니…. 나는 여덟 살 나이에 처음 세상이 달라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수업 마칠 즈음 선생님께서 채점을 끝낸 시험지를 나누어 주셨다. 호명을 받고 선생님 앞으로 간 아이들이 시험지를 받을 때마다 환호성을 질렀다. 거의 다 90점 100점이었다. 선생님은 가장 점수가 잘 나오는 과목을 골라 시험지를 나누어 주셨다. 아마 비 오는 날 마중 나온 부모님들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으셨나 보다. 

그런데 나는… 30점이었다. 교실을 나와 아버지의 우산 밑으로 달려갔다. 아버지께서 "시험지 함 보자."하셨다. 아이들이 시험지를 흔들고 나와 제 엄마에게 자랑하는 모습을 아버지도 보았으니까. 나는 꾸물꾸물 가방 속에서 시험지를 꺼내 드렸다. 그렇지만 주눅들지 않았다. '아부지가 이렇게 손수 마중 나왔는데 설마 화내시랴.' 그렇게 생각했다. 그랬다. 아부지는 화내지 않고 시험지를 접어 돌려 주셨다.

빗물이 고여 가득한 운동장을 가로질러 집으로 가는 동안 나는 금세 시험점수 따위를 잊어버렸다. 오로지 나만을 위해 우산을 받쳐주는 아버지의 생경한 사랑에 푹 빠져버렸다. 나는 용기를 내어 어리광을 피우고 싶었다. 구멍이 난 내 고무신으로 빗물이 들어와 자꾸 질퍽거렸다. 나는 우산 속에서 아버지의 겨드랑이 밑으로 파고들며 말했다. 막내처럼.
"아부지예, 내 고무신 빵꾸 났심더. 새 운동화 사 주이소."


두번째
중학교 때였다. 살만하던 우리 집은 졸지에 쫄딱 망하고 우리 가족은 시골로 내려왔다. 나는 어느덧 불밤송이 중학생이 되었다. 부모님과 동생들은 읍내에서 한참 떨어진 시골에 계셨고 나는 읍내에서 자취생활을 하며 학교에 다녔고, 일주일마다 집에 가서 생활비와 쌀과 밑반찬을 타왔다. 어느 날 일주일 만에 시골집에 들어선 나는 어머니에게 투덜거렸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자기 책상이 있는데 중학생이 되어도 책상 없는 놈은 나 혼자뿐 일거라며 볼멘 소리를 했다. 문밖에서 듣고 있던 아버지는 묵묵부답이셨다. 


다음 주 토요일 나는 일부러 고향집에도 가지 않았다. 자취방에서 토요일과 일요일을 혼자 보냈다. 무언의 시위였다. 그리고 월요일 날이 되어 학교에 갔다가 수업을 끝내고 자취방에 돌아왔다. 그런데 자취방 한쪽에 내가 그토록 바라던 책상이 놓여 있었다. 깜짝 놀라서 보니 새 것이 아니었다. 그 책상은 시골집에서 아버지께서 놓고 쓰시던 앉은뱅이 책상이었다. 멀뚱히 보고 있는 나에게 자취방 주인이 말해 주었다.

"네 아버지가 끈으로 멜빵을 해서 여기까지 짊어지고 오셨더라."

시골집에서 읍내 자취방까지는 30리가 넘는 길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에 서둘러 자취방에 책상 놓아 주고 시골집으로 돌아가셨다. 낡은 책상보다 더 무거운 현실의 무게에 벌겋게 짓눌린 당신의 어깨를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으셨을까. 아버지는 그렇게 다녀가셨다.

세번째
다시 3년 후. 여전히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았고 아버지는 병이 드셨다. 나는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때도 같은 중학교를 나온 친구 양길동과 함께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주로 교복 대신 파란 실습복을 입고 학교를 다녔다. 실습복 왼쪽 어깨에 계급장처럼 달린 '기술인은 조국근대화의 기수'라는 견장을 우리는 꽤 멋있다고 생각했다. 대학교에  못가는 아쉬움을 그것으로 달랬다. 

그날 나는 늦은 실습을 끝내고 한 무리 고등학생들 속에 섞여 교문을 나서고 있었다. 그런데 교문 앞 개천이 흐르는 좁은 다리 난간에 남루한 차림을 한 초로의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지나가는 학생들을 어색하고 겸연쩍은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를 찾는 것 같았다. 친구들과 함께 홀가분한 마음으로 교문을 나서던 내가 무심결에 바라 본 그 분은 내 아버지였다. 이미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치신 아버지였다.

내가 먼저 보지 못했다면 당신은 해가 저물도록 그 난간을 서성거렸을 것이다. 객지에서 본 고등학생 아들이 대견 하셨을까. 아버지는 나를 보자 아이처럼 환해지셨다. 그리고 꼬깃꼬깃 신문지에 싼 돈을 건네주셨다. 밀린 수업료였다. 나는 "왜 교실로 찾아오지 않고 기다리셨냐." 고 짜증을 냈다. 아버지가 교문 밖에서 몇 시간씩이나 기다린 이유를 알고 있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나는 갑자기 느꺼워져 아버지의 손목을 잡고 내 자취방으로 가자고 하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뿌리치셨다.
"자취방에는 친구도 있을 꺼 아이가…."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완강하셨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허위허위 떠나가시는 아버지를 끝내 잡지 못했다. 그 날 이후 내가 대학에 입학할 때도, 결혼할 때도, 어머니의 회갑연에도 아버지는 계시지 않았다. 아버지가 세번째 다녀가신 그 날, 그 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내 가슴 깊은 곳에는 회색 진눈깨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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