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형식 Jun 25. 2022

비 오는 날, 순두부

먹거리에 대한 절대적인 또는 무조건적인 경외심

비 오는 토요일 오후, 열두 살 아들과 함께 막걸리와 손두부를 사 오는 길이었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하늘을 보며 아들이 물었다.

"아빠, 이상해요."

"뭐가?"

"장마철도 아닌데 왜 이렇게 자주 비가 와요?"

"글쎄, 나도 모르지."     


장마철이 아닌데 비가 자주 오는 이유를 낸들 어떻게 아나. 아들도 정답을 기대하지 않은 듯 하늘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모처럼 아비와 함께 하는 주말인데 비 때문에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푸념성 질문이라는 걸 나도 알겠다. 하지만 내 아들은 착한 놈. 우산을 접고 아파트 계단을 오르며 또 물었다.

"아빠, 옛날에도 이런 우산이 있었어요?"

"당근 있었지."     

아들은 '선지자'인 아비의 구겨진 자존심을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나는 효자 아들의 호기심을 풀어주기 위해 흑백영화 필름 같은 그 시절을 되감았다. 


엄지손가락만큼 굵은 대나무로 만든 우산대와 가르다란 우산살 그리고 얇고 파란 비닐을 덮어 만든 비닐우산. 그 가벼운 우산이 바람을 맞아 '휙' 뒤집어지는 장면까지 말해주면서 우리는 깔깔 웃었다. 가쁜 숨을 몰아 쉬며 5층 계단을 오를 때까지, 비닐우산 추억담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아파트 현관문이 열리고 아내와 딸이 우리가 사 온 따끈따끈한 손두부를 보고 환호하는 바람에, 아직 남아 있는 추억을 다 말하지 못했다. 이제 내 가슴속에 잔잔히 남아있는 그 기억을 말해야겠다.     


그날도 오늘처럼 비가 왔고, 내가 열두 살인 내 아들만 할 때였다. 그날 나는 차들이 줄을 지어 휙휙 지나가는 약수동 큰 도로변에서 비닐우산 두 개를 들고 무료하게 서 있었다. 누구를 마중 나갔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한 손은 나를 위해 우산을 펼쳐 비를 바치고, 또 다른 손에는 다른 이를 위한 또 하나의 비닐우산을 옆구리에 기고 있었다. 하지만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았고, 나는 잿빛 건물들과 느리게 달리는 차들 그리고 점점 가늘어지는 빗줄기를 보며 '이제, 그만 기다리고 갈까'하고 망설있었다. 그런던 어느 순간이었다.     


차도 뒤쪽에서 “끼익!” 브레이크 잡는 소리와 함께 "꽈당!" 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초로의 남자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빗길에 넘어져 있었다. 다행히 큰 사고는 아니었다. 얼핏 멈추어 이 광경을 바라보던 행인들이 종종걸음으로 제 갈 길을 갔다. 그런데 초로의 남자는 넘어진 자전거를 냉큼 일으켜 세우지 않고 망연자실 서 있었다. 아저씨의 자전거 뒤에 실은 나무통이 함께 넘어지면서 그 속의 순두부도 쏟아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족히 한 솥은 넘어 보이는 순두부는 일부러 도로 위에 부어놓은 듯 소담하게 쌓여 있었다. 금방 만들어서 어디로 배달을 가는 중이었는지, 아스팔트 위의 순두부는 아직 뜨거운 김을 내고 있었다. 아저씨가 부서진 나무통을 이리저리 맞추어 수습해 보았지만, 순두부를 담았던 나무통은 이미 산산조각이 나서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보였다. 그 아저씨와 순두부가 불쌍해 보였다. 나는 다가가서 들고 있던 우산 하나를 아저씨께 펴서 주었다. 비닐우산 위로 후드득 떨어지는 빗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아저씨는 비닐우산을 순두부 위에 받쳐 들고 한참을 눈을 떼지 못하고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생각이 난 듯 내가 준 비닐우산을 뒤집어 아스팔트에 편평하게 펴서 내려놓고는, 두 손으로 쏟아진 순두부를  까뒤집어진 우산 안으로 퍼 담았다. 나는 속으로 '어어, 내 우산 내 우산'하고 중얼거릴 뿐 말리지 못했다. 길 위의 순두부는 땅에 닿았던 부분을 제외하고 순식간에 비닐우산으로 옮겨졌다. 빗물이 아스팔트를 깨끗이 씻어놓은 덕분인지 우산 속 하얀 순두부가 불결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먹거리가 아닌 것처럼 낯설어 보였다. 


아저씨가 마지막으로 비닐우산의 안쪽 얇은 댓살을 모아 쥐니 우산은 영락없는 비닐 보따리가 되었다. 아저씨는 대뜸 그 우스꽝스러운 비닐 보따리를 내 손에 건네주었다. 묵직했다.

"금방 집에서 만든 거다. 먹어도 까딱없다. 꼭 집에 가져가거라."     

아저씨는 나에게 소중한 물건을 맡기는 것처럼 진지했다. 그리고 절대 버리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아저씨는 넘어진 자전거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자전거를 끌고 절뚝거리며 굵어지는 빗줄기 속으로 사라졌다. 


나도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내가 꼭 우스꽝스러운 비닐 보따리가 된 기분이었다. 누군가 다가와 '그것 버릴 거야? 가져갈 거야?'하고 놀릴 것만 같았다. 나는 약수동 긴 언덕길을 걸어 올라 헐레벌떡 집으로 돌아왔다. 혼자서 비닐 보따리를 돌아온 나를 보고, 누나가 놀라며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열두 살이었던 나는 거짓말을 했다. 어떤 순두부 장수 아저씨가 정류소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팔고 남은 것이라며 주더라고  거짓말이었다. 나는 왜 누나한테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을까. 

      

그날 저녁 밥상에 순두부찌개가 올라왔다. 우리 가족은 물론 옆집 상식이네까지 맛있게 나누어 먹었다. 먹거리에 대한 절대적인 또는 무조건적인 경외심을 안고 살던 시절이라서 그럴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이 좋은 세상의  열두 살인 내 아들놈이 혹 그 시절을 살았더라도 그랬을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장마철이 아닌 요즘 비가 잦는 이유는 여전히 모르겠다.


작가의 이전글 아버지는 세 번 다녀가셨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