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연기법 #연기사유 #상즉상입
놀이공원에서는 저녁 여섯 시가 되면 동물 퍼레이드가 벌어진다. 배우들이 다양한 동물 탈을 쓰고 놀이공원을 돌아다니는데, 아이는 그중에서 유독 호랑이를 무서워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공원 한적한 곳에서 어느 배우가 호랑이 탈을 쓰는 장면을 목격했다. 아이는 그 후부터 더 이상 호랑이를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호랑이가 등장할 때마다 반갑게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재미있게 놀 수 있었다.
아이가 방학을 맞이해 과수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생겼다. 그곳에서 아이는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리고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원래 없었던 사과가 사과나무에서 주렁주렁 열리는 모습을 매일 생생하게 지켜봤다. 사과가 그냥 마트에서 만들어지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사과는 사과나무에서 열리는 것이었다. 사과나무와 양분과 태양과 물 등등, 애초에 사과가 아닌 것들이 모여서 사과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원래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그 생성 과정을 목격하는 것은 대상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단서다. 모든 것이 변하는 세상에 익숙해진 우리는 애초에 그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원래는 존재하지 않았다가 어떤 이유로 다시 만들어지거나 생겨난다는 것은 사실 매우 이상한 일이다. 이런 식의 변화가 의미하는 바는 그런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주지만, 우리는 변한다는 사실조차 익숙하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사과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깊게 살피는 것은 연기 사유의 방법 중 하나다. 지금 눈앞에 있는 듯 보이는 대상들을 살피고 ‘그것’이라고 할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음을 보는 방법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처음에는 그 사과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없다가 나타났는데,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보니 사과가 아닌 다른 것들로 말미암아 모습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과가 무엇인지 살펴보면 사과가 사과 아닌 것들이라는 이상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사과가 사과 아닌 것들이라는 결론을 아는 것은 깨어남에 있어서 의미가 없다. 그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 즉 연기적인 사유가 반복적으로 이뤄져야 하고 그러한 사유를 통해서 연기적인 관점이 자리 잡게 된다. 기존의 이원적 관점 또는 시간을 기반으로 하는 선형적 관점에서 연기적 관점으로의 전환이 이뤄져야 한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가 있긴 하지만, 이렇게 알아들어도 대부분은 여전히 이원적 인식으로 그 사과의 생성 모습을 사유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원적 관점에서 시작하더라도 아주 중요한 전환 포인트에서 이원성의 틈을 알아차리고 비이원의 틈을 벌려야 하지만, 그동안의 관성이 워낙 강해서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 버리기 일쑤다. 그러나 괜찮다. 다들 그렇게 오고 감을 경험하면서 서서히 눈을 뜨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전환의 포인트는 '사과'라고 붙들고 있던 개념을 자각하는 지점이다. 사과라는 개념을 붙들고 그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사과가 생겨나는 지점을 살펴보니 '사과'라는 것이 실제로는 없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개념으로는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단지 이름뿐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때 생각 개념과 실제 관찰되는 것과의 간극이 벌어진다. 그럴 때 이름이 떨어져 나간다거나 생각에서 벗어난다는 말의 진짜 의미를 깨닫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이원적 인식 속에서 만들어낸 개념 속에서만 ‘것’ 존재한다. 우리의 직접적인 경험은 결코 ‘것’을 발견하지 못하지만 모양과 그룹 짓는 습성으로 ‘것’을 만들어낸다. 모양을 기준으로 ‘것’을 만든다. 심지어는 모양이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것’으로 만드는 경우도 빈번하다.
이원성을 떠나,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존재하는 것은 계속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계속 존재하지 않는다. 있다가 없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존재를 하다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 존재라고 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처음부터 현상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원적인 관점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착각이다. 그러나 그런 이원적 관점을 벗어나서 보면 모든 것이 존재하는 것이 된다. 존재뿐인 것이다.
또 하나의 전환은 상즉상입의 관점이다. 상즉상입이라는 말은 서로가 서로를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인데, 실제로는 포함할 ‘서로’가 없지만 현실적인 흐름과 맥을 같이 한다는 점에서 꽤 쓸모있는 접근이다.
상즉 > 서로 의지하고 있어서 서로가 서로를 드러나게 한다.
상입 > 서로를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 현실적인 흐름이라고 하는 것은 유용성을 말한다. 모든 것들이 서로 속에 서로가 들어있다는 것은, 이원적 관점으로 이해한다고 해도 무리가 없으며 그런 이해를 통해 함께 살아가는 사회 환경에 맞게 긍정적으로 생활하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의 눈으로 충분히 관찰이 가능하고 이성의 관점을 벗어나 있지 않다.
사과가 무엇인지 살펴보면 사과의 원인과 조건이라 할 수 있는 사과씨와 태양 에너지와 물과 양분 등이 그 속에 들어 있다. 이렇게 알 수 있는 것 외에 셀 수 없이 많은 원인과 조건들로 인해 사과의 모습이 생겨났다. 사과라고 할 것이 없지만 사과도 마찬가지로 다른 것들의 원인과 조건으로 포함돼 있다. 이런 이성적인 이해는 현상적으로도 쓸모있게 기능한다.
그러나 깨달음에 있어서 상즉상입의 진짜 의미는 한 스텝을 더 들어가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여 서로가 서로 속에 들어있다는 것이 표면적인 의미지만, 결론은 상즉상입이라고 할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있다’와 ‘없다’에서 ‘없다’가 아니다. 상즉상입 자체가 상즉상입할 ‘것’의 존재가 허상임을 말해준다는 의미다. 이것이 이원적인 이해에 그치더라도 나쁠 것은 없다. 그러나 그 본 뜻을 이해하는 것은 그런 이원적 오해와는 비교할 수 없는 범주의 것이다.
내 의식이 어떤 개념을 갖고 대상을 붙들고 있는지 살펴보자. 고정적으로 그런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지점이 어딘지 살펴보는 것이다. 처음에는 드러나 있지 않던 것들이 모양이 생기는 과정을 살펴도 그 개념(사과)에 해당하는 알맹이를 찾을 수 없고, 지금 이대로도 시시각각 계속 변하고 있으니 아무것도 잡을 수 없다. 사과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라서 사과와 다른 것들이 모양으로는 구분이 되지만 실제로는 구분되지 않는다.
우주의 모든 것이 사과 한 알을 만들어내듯, 사과 속에 우주의 모든 것이 들어가 있다. 상즉상입의 의미는 각각 개별적인 존재의 부정이다. 의지하고 그 속에 들어가고 할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실용성이 또 다시 존재라는 개념을 다시 세울 것이다. 만질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냄새도 맡을 수 있다는 사실이 존재성을 굳건히 유지하려 들 것이다. 원인 조건이 모인 것을 하나의 덩어리진 존재로 인식하는 아이러니가 당분간은 벌어질 것이다. 이렇게 이원적 관점으로 계속 돌아오는 것은 당연한 과정 중에 하나다. 그러다가 이원 너머 비이원을 힐끔힐끔 보기도 하고, 어쩔 때는 그동안의 공부가 무색할 정도로 실체관념에 휘둘리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한 번 본 것은 못 본 게 되지 않는다. 일단 한 번 보고 감을 잡으면 그때부터는 못 본 것으로 되돌아가지 못한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저기 먼 달나라의 얘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이 글자들이고, 컴퓨터 혹은 휴대전화 화면이고, 무엇보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다.
***영화 'Arrival(컨텍트)'은 '테드 창'의 걸출한 단편 소설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 중 한 에피소드를 원작으로 한다. 표면적으로는 SF지만 언어와 시간, 선형적 흐름과 비선형적인 흐름에 대한 이야기를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 '외계인'을 등장시켜 흥미롭게 풀어낸 수작이다. 제목이 '당신 인생의 이야기'인 것은 내가 하는 모든 이야기처럼 소설 역시 당신 인생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