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말록 Oct 23. 2024

생각이 물질을 만들어 낸다는 거짓말

#깨달음 #착각 #바른견해의 기준

개인 미디어를 통해 그동안 쉽게 접할 수 없었던 가치 있는 지식을 쉽게 얻을 수 있다는 점은 참 좋은 일이다. 정보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무한한 가능성을 만들어갈 수 있는 큰 혜택이다.


정보의 양이 많아지면 결국 선택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이슈로 제기된다. 모든 정보를 받아들일 수 없으니 결국 선택적인 정보만 흡수할 수 있는데, 문제는 그 선택이 개인의 취향에 따라 경향성이 가중된다는 점이다. 그 알고리즘은 우리의 선택이라기보다는 플랫폼과 마케팅 기술의 영역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균형 있는 기초정보의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균형 있게 자리 잡은 기초 정보의 구조, 즉 스키마는 그 위에 얹어지는 정보들을 제대로 평가하고 판단하는 데 있어서 기준이 된다.


예전에는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정말 어려웠다. 정확히는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라, 정보를 얻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일단 알아야 죽을 쑬지 밥을 짓든 할 테니 말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소수에게만 비밀로 전해지는 신비한 비법 같은 것으로 전락하고, 종교의 틀 속으로 들어가 믿어야 하는 신앙으로 자리 잡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석가모니 이후 약 400년 동안 오직 입으로만 그 가르침이 전해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과정에서 어떤 오해와 신화가 난무했을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반대가 되었다. 정보가 없어서 깨닫지 못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깨달은 스승을 찾기 위해 히말라야를 넘을 필요도 없고 중국 유학을 떠날 필요도 없이 유튜브만 켜면 관련 정보가 넘쳐난다. 오히려 너무 많은 정보로 인해 지뢰밭이 된 상황이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뭐라도 주장할 수 있다. 증거를 제시하지 않아도 되고 자격증도 필요 없으니 얼마나 많은 잘못된 이야기들이 넘쳐나겠는가?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정보의 과잉이 문제가 되는 시대다.


이런 지뢰밭을 무사히 건너는 길은 균형 있는 기초정보를 미리 확보하는 방법뿐이다. 누가 대신 당신을 무사히 인도해 주지 못한다. 당신이 그 누군가를 선택하더라도 그 선택의 기준이 엉뚱하다면 선택이 잘못되기는 마찬가지다.


핵심은 언어와 개념으로 만들어진 모든 것은 우리의 이원적 의식 구조 안에서 탄생한 것이며, 그 안에서는 답이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아는 것이다. 우리의 탐구 목적은 무엇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 구조의 근본적인 원리를 이해하고 그로 인해 만들어진 환상과 착각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이런 주제의 유튜브를 본 지 오래됐지만, 오늘 아침 알고리즘의 선택으로 하나의 영상을 보게 되었다. 내용은 주로 선 공부에 대한 부분이었는데, 핵심은 생각이 물질을 만들어낸다는 이야기였다.


한국은 현재 깨달음의 흐름이 대부분 조계종과 선불교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다. 조계종은 종교의 역할로 비대해진 지 오래되어 거론할 필요가 없고, 그나마 공부에 도움이 된다고 여겨지는 주류가 선 공부 혹은 마음공부라고 불리는 조사선이다.


이 선 공부의 영향 때문인지 생각이 대상 경계를 만들어낸다는 이야기를 참 많이 들어왔다. 내가 없으면 세상이 존재하지 않으며, 생각이 물질을 만들어낸다는 이야기다. 어린아이는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분리 없이 세상을 하나로 보지만, 우리는 생각으로 모든 것을 분리해서 인식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렇게 생각하는 내가 없으면 세상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내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들어낸다고 하는 이런 말은 얼핏 들으면 깨달은 사람들이 할법한 그럴듯하게 들린다. 


하늘의 별을 인식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다면, 그 별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지구에 인간이 모두 사라지면 지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펼친다면, 그런 사람은 아직 깨달음이라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인식론의 관점에서 인식되지 않는 것의 존재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직 많이 모자란 이야기다.


간단히만 생각해봐도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하는 당신이 눈을 감고 나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거나 인식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렇게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는 간단한 사실 때문이다. 나의 세계에서 당신은 없다고 그는 말할지 몰라도, 그것은 단지 자가당착이고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다. 내가 이렇게 멀쩡히 있다는 사실을 그만 모를 뿐이다. 옆에 있는 내 친구도 아는 사실을 그만 모를 뿐이다.


만일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펼치는 사람이 있다면, 잘못된 정보임을 알아채고 걸러야 한다. 나보다는 많이 공부했으니 뭐라도 배울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장님이 장님을 안내하는 격이다. 그런데 정작 그렇지 않은 경우를 찾는 건 그렇게 쉽지 않아 보인다.


깨달음은 사실 어렵지 않다. 어려운 것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엉뚱한 이야기를 믿어버리기 때문에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다.


하나만 기억하자. 이 글을 포함해 당신이 받아들이는 모든 이야기는 개념으로 구성돼 있으며, 그 개념과 언어는 실상을 드러내지 못한다. 단지 그것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생각은 세상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생각 또한 물질과 같은 구조로 일어나는 파도와 같다. 그런 생각이 다른 물질을 만들어낸다는 발상은 오해다. 대상 경계는 이미 그렇게 드러난 것이고, 생각도 그렇게 드러난 것이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생각은 개념적인 구분을 만들고 그것을 독립적인 존재로 착각하게 만들지만, 현상적으로 드러난 모양은 생각이 있든 없든 그대로다. 즉, 생각을 하지 않아도 컵은 컵의 모양으로 인식된다는 말이다.


내가 보지 않는다고 별이 없는 게 아니다. 별은 내가 보든 보지 않든 상관없이 존재성이 없다. 인식돼도 존재성이 없고, 인식되지 않아도 존재성이 없어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왜 없는지는 연기법을 설명한 이전 글들을 참고)


개인의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다. 마음 또한 생각과 마찬가지로 일어난 파도와 같아서, 개인의 영역에서 인식되는 마음은 궁극의 무엇이 아닌 그로부터 드러난 것일 뿐이다. 세상을 내 마음이 나투어낸 것이라고 할 때는 개인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지만, 너무 자주 이런 식의 표현들이 사용된다. 그래서 ‘마음’ 또는 마음공부라는 단어가 그리 좋은 단어는 아니다.


개인의 마음이 따로 있고 실상의 마음이 따로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것이 모두 같은 것 아닌가? 개인의 마음 또한 참나라고 할 수 있는 그것인데 왜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가?


파도가 바다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바다라고 해도 틀리지 않지만, 그렇다고 부분인 파도를 전체인 바다라고 하지 않는 것과 같다. 따라서 파도가 다른 모든 파도를 만들어낸다는 식의 말은 적합하지 않다. 그것은 바다를 보지 못했거나 파도를 바다로 착각했거나 둘 중 하나다.


생각은 물질을 창조하지 않는다. 다만 개념을 만들어내고 착각을 심화시킬 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믿음은 진실과 간극이 있을 때나 필요한 구차한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