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의시작 #앙굴라마라 #깨달음 #이원적구조
우리의 이원적 생각 구조 안에서는 무엇이든 결론을 내리고 정의를 내려야 편안함을 느낀다. 그것이 임시일지언정 일단 규정하고 결론을 지어야 그것을 통해 또 다른 결론을 도출하고, 또 그것을 통해서 또 다른 결론을 쌓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기하학에서 점을 정의해야 그것을 바탕으로 나머지 도형들을 만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점이 있어야 선을 만들고, 선이 있어야 면을 만들고, 면이 있어야 정육면체를 만들 수 있다.
애초의 점의 정의란 것이 위치 값은 있으나 부피가 없다는 황당한 개념에서 시작했으니, 그 위로 쌓아 올린 도형들이야 더 이상 거론할 필요가 없다는 걸 사람들도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대응하고 살아가기 위해 인간은 줄곧 결론을 내려야만 했다.
당신이 굳게 믿고 있는 그 결론, 그는 이러한 사람이다, 이것은 좋은 것이다, 이것은 나쁜 것이다, 나는 그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잘못된 행동이다, 이것은 값진 것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가족을 사랑한다, 그녀는 나를 미워한다, 나는 부유하다, 내 마음은 아프다, 때로는 행복하다 그러나 불행하다, 신은 사랑이며 진리는 지금 여기에 있다,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돌고 있으며, 과학은 정확한 사실이며 학문은 고귀하고, 사과는 맛있으며, 칼은 위험하고… 내가 태어나 이렇게 세상을 살아간다… 이 모든 결론들.
그 결론들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한 번 부여잡은 결론은 그것이 수정되더라도 곧 다른 결론으로 대체된다. 우리의 이원적인 의식은 그것을 꼭 부여잡아야만 한다. 결론을 지어야 하고 구분을 지어야 안정감을 느낀다.
이 모든 문장들도 마치 어떤 결론을 향해 치닫는 것처럼 보이며,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면 모종의 결론을 손에 쥘 수 있을 거라고 당연하게 생각한다.
심지어는 영화의 열린 결말 조차도 그대로 두지 못하고, 결국 이랬을 것이라고 혹은 저랬을 것이라고 나름의 결말을 만들고 안주한다.
여기에서 모든 문제가 시작된다. 우리 스스로 그것을 문제라고 인식하는 바로 그 ‘문제’가 발생한다. 모든 사람들이 느끼는 불만족은 바로 그렇게 섣불리 지어진 결론에 그 뿌리를 두고 자란다.
나의 결론은 그런대로 정확하다고? 분명 나는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나 부모에게 아무것도 물려받지 못하고 온갖 학대와 괴롭힘으로 고단한 인생을 살았으며, 앞으로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며 결국 이렇게 살다가 죽을 것이 확실하다고?
아니면 그런대로 무난한 가정에 태어나 그런대로 무난한 교육과 직업을 갖고 그럭저럭 만족하면서 삶을 살아가니, 그리 나쁠 것 없는 인생을 계속 살다가 죽을 것만 같다고?
그럴 리가!
그러나 당신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거기에 누가 태클을 걸겠나. 당신이 내린 모든 결론을 진실로 만드는 능력은 당신 스스로가 가지고 있으니, 누구도 그것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모든 결론이 결국 이원성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점은 꼭 기억해 두자. 이원성의 근본 구조, 즉 어느 하나를 택하더라도, 그것은 그것 아닌 것들에 의해 조건 지어져 있으며, 그 자체로는 아무런 존재성이 없다는 것만 잊지 말자. 그것이 모든 가능성의 문을 열게 한다. 악몽을 꾸더라도 꿈에서 깰 수 있는 비상구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앙굴라마라는 원래 영리하고 재능 있는 청년이었으나, 악한 스승의 꾐에 빠져 사람을 죽이고 엄지손가락을 잘라 목에 걸고 다녔다. “천 명을 죽여야 한다”는 왜곡된 신념에 사로잡혀 사람들을 해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사람들은 그를 “앙굴라마라,” 즉 “손가락 목걸이를 한 자”라는 뜻의 이름으로 불렀다. 그는 마지막 희생자로 석가모니를 골랐고, 그를 죽이기 위해 쫓았으나 아무리 달려도 따라잡을 수 없게 되자 소리를 질렀다.
“멈춰라!”
그러자 석가모니가 말했다.
“나는 이미 멈췄다. 이제 그대가 멈출 때이다.”
무엇을 멈추라는 말일까?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나말록으로 결론짓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을 OOO으로 결론짓고 있다면, 바로 그것을 멈추라는 말이다. 당신이 홀로 이 지구별에 태어나 외롭고 힘들게 투쟁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결론 내린, 그것을 멈추라는 말이다.
아무리 그럴싸한 결론이라고 해도, 그것이 당신을 구해주지는 못한다. 자신의 세계를 감싸고 있는 이원적 구조를 자각할 때까지 우리는 마치 앙굴라마라와 같이 부처를 쫓게 되는 운명이다. 때로는 비싼 적토마를 타고, 때로는 신비로운 근두운을 타는 것만 다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