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의 미래
사람을 점수로 환산할 수 있다는 착각
대한민국에 살면서 스펙에 대해 한 번쯤 고민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스펙(spec)'이란 말은 영어의 'Specifications'에서 유래된 신조어로 원래는 제품의 사양을 뜻한다. TV의 Specifications이라고 하면 화질, 크기, 무게 등과 같이 객관적으로 표기 가능한 제품의 특징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정보는 비슷한 제품과 품질 비교를 하는 데 유용하게 쓰인다. 한국에서는 사람에게 사용하는 스펙도 여기서 따온 것이다. 스펙은 한 사람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사양화한 것을 뜻하며, 점수나 등급처럼 수치로 환산할 수 있기 때문에 타 정보와 비교하기 쉽다. 다시 말해 스펙은 '비교를 위해 특화된' 사람의 능력치라고 볼 수 있다.
취업포털 잡코리아에서는 구직자에게 '합격 스펙'이라는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각 기업의 합격자 스펙을 점수로 환산해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스펙 항목은 '학점, 토익, 토익스피킹, OPIC, 외국어(기타), 자격증, 해외 경험, 인턴, 수상내역, 교내/사회/봉사'까지 총 8개다. 각 스펙은 총점으로 환산되는데 기업마다 합격자의 평균 스펙 지수와 최고/최저 지수가 공개되어 있어 자신의 점수와 비교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전자기업 A의 합격자 평균 스펙 지수는 333이고, 식품기업 B의 평균 스펙 지수는 294이다. 상위 20% 평균 스펙 지수는 A사 881, B사 812이다. 각 항목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도 볼 수 있다. A사는 합격자 76.8%가 외국어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으며 합격자 평균 TOEIC 점수는 842점이다. B사는 합격자 60.4%가 외국어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고 평균 TOEIC 점수는 819점이다. 이런 식으로 8개 항목에 대한 세부 점수가 공개되어 있어 스펙 지수의 근거를 만든다.
1점 단위의 숫자로 스펙을 환산시켜 보여주는 것은 능력에 대한 정확한 측정이 가능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사람의 능력을 위의 8가지 항목으로만 판단할 수 없다는 건 누구나 알지만 구체적인 숫자로 제시되는 스펙 지수를 통해 나와 타인을 비교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2020년 9월 취업준비생 1,316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88.7%는 '자신의 스펙이 부족하다'라고 답했다.(잡코리아X알바몬) 같은 해 11월 구직자 1,788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스펙 준비현황' 설문조사 결과에서는 응답자의 93%가 '평소 취업 스펙을 준비해야 한다는 조바심을 느낀다'라고 답했다. 또한 스스로 취업 스펙에 점수를 매겨보라는 질문에는 100점 만점에 평균 52점을 매겼다.(잡코리아)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이 질문은 당장 취업을 앞둔 사람뿐 아니라 청소년이나 이미 일을 하고 있는 중장년층까지 누구나 고민하게 되는 주제다. 그리고 스펙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줄 것만 같다. 미래는 보이지 않지만 스펙은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기준에 맞는 능력을 키워나가는 일은 '제대로 된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준다. 그럴수록 나는 무엇을 잘하고, 무슨 일을 좋아하며, 무슨 일이 잘 맞는가? 이 근본적인 질문은 점점 희미해진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분명 '나'인데 '나'로부터 시작하는 질문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어쩌면 평생 해야 하는 이 질문에는 정답이 없고, 점수로 환산되는 스펙에는 객관적인(그렇다고 믿는) 등급이 있기 때문이다. 스펙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을 하나의 통지표처럼 받아볼 수 있게 된다. 그 속에서 자신보다 우월한 사람들과 열등한 사람들을 구분할 수 있게 되는데, 이러한 줄 세우기는 한국사회에서 익숙한 평가 방식이다. 점수로 나를 정체화하면 경쟁에 대한 부담은 생기되, 답이 없는 혼돈 속에서 고민할 필요는 없다.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평범한 사람으로서 나도 이 질문에 오래도록 매달렸다. 그러면서도 일반적인 기준에 맞추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는 게 맞을 것이다. 하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되고 싶은 것은 없었다. 때문에 어떤 목표도 만들지 못했다. 나에게는 인생의 골(goal)이 없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신할 수 있었던 건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들은 후회를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후진 선택이라도 스스로 결정한 것에 대해서는 남 탓을 할 수 없다. 그 뒤끝 없는 괴로움이 좋았다. 그러니까 내가 가진 유일한 기준 하나는 '자발성'이었다.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선택인가? 이 질문을 구명보트처럼 붙잡고 20대 내내 거친 바다 위를 떠다닌 것 같다. 때때로 내가 붙잡고 있는 것이 나를 구해주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며.
돌아보면 이 선택은 나쁘지 않았다. 여전히 세상의 기준에 맞지 않는 삶을 살고 있지만 나는 내 일이 나와 잘 맞는 것 같다. 내가 하는 일이 꽤 맘에 든다. 스펙 지수로만 보면 최하점을 차지하겠지만, 나는 세상에 뒤끝이 없다.
때문에 어떻게 하면 미래연구 분야에서 일할 수 있는지, 혹은 창업을 할 수 있는지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어떠한 표준적인 방법을 따라 커리어를 쌓은 게 아니기 때문에 깔끔하게 정리된 답변을 내놓기가 어렵다. 지나온 과정을 숫자로 환산할 수 있다면 좀 더 쉬울지도 모른다. 400점만 넘으면 되는데, 아직 355점이니 좀 더 채우라고 말이다. 하지만 내가 지나온 과정을 점수로 환산할 수는 없다. 우리 모두의 삶이 그러하듯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지나온 삶은 오로지 우연의 산물일까? 애초 스펙 쌓기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을 위해 이 글을 쓰기로 한 건 아니었다. 다만 세상에서 표준이라고 제시하는 방식들이 어떠한 개인에게는(적어도 나에게는) 별로 효과적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나의 결정적인 순간들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구체적으로 원하는 것이 생겼던 때에 대해. 선택받고 싶어서 나를 어필했던 순간들에 대해.
실기시험을 보고 들어간 대학교, 일본에서 외국인으로서 면접을 보았을 때, 홍대 라이브 클럽에서 오디션을 보았을 때, 내 회사 이름을 걸고 과제를 따 왔을 때. 내가 선택될지 안될지 모르는 채 최대한 나의 능력을 보여야 했던 순간들.
이 기억을 토대로 나의 '주관적 스펙'을 기록해 보기로 했다.
1. 제대로 된 문장 쓰기
- 이것만 제대로 하면 제대로 된 문단 쓰기, 제대로 된 한 편의 글쓰기로 이어갈 수 있다. 생각을 글로 정리할 수 있는 능력은 언제든 유용하다.
2. 조리 있게 말하기(+포인트 파악)
- 말하는 데 공포증이 있던 나는 항상 발표 전 종이에 키워드로 생각을 정리해 놓곤 했다. 패닉이 와도 그대로 읽으면 되므로 메모는 늘 든든하다.
3. 전달력 있는 목소리와 말투
전달을 잘하려면 목소리를 크게 내야 된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때때로 속삭이는 것이 더 효과적일 때가 있다.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알아서 귀를 기울인다.
4. 집중하여 대화하기
먼저 눈을 맞춘다. 그리고 상대를 말을 주의 깊게 듣는다. 숨은 의미를 파악하려는 시도를 멈추고, 상대가 어떠한 피드백을 원하는지에 집중한다.
5. 주어진 것보다 조금 더 하기
일을 하면서 지금 상태에서 무엇을 좀 더 해볼 수 있는지 상상해본다. 더 해도 재미있을 것 같으면 주어진 과업의 범위를 넘더라도 시도해본다. 마음이 끌리지 않으면 무리하지 않는다.
6. 다수의 청중 앞에 서는 것을 즐기기
내 음악을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많다는 건 행복한 것이다. 그 자체를 즐기며 최선을 다한다. 모두의 시간은 소중하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스펙이라 하기 힘든 이 6가지 항목은 내가 살면서 배운 것들을 떠올리며 정리한 것이다. 물론 이 능력은 개인적인 판단이며, 검증하기 힘들다. 때문에 점수로 환산될 수도 없다. 내가 만든 지표인 만큼 각 능력이 얼마나 발휘되고 있는지 성장하고 있는지도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자유가 있지만 고독한 작업이기도 하다. 이렇게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연습은 타인과 비교하여 자신을 갉아먹는 습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준다. 스스로 책임진다는 것의 무게. 존엄. 이에 대한 부끄러움도, 뿌듯함도 온전히 내 것이다.
평범한 대한민국 사람으로 살아온 나도 오랜 점수의 압박에서, 등급의 라벨링에서, 스펙의 콤플렉스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많이 편해졌다. 나다운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만의 스펙을 활용하며.
'스펙'은 미래에도 유효할까? 나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그러나 스펙의 요소는 점점 다양해질 것이다. 세상의 기준에서 벗어나 개개인의 고유한 특성에서 출발할 것이다. 우열의 세계에서 차이의 세계로 이동할 것이다. 사람의 능력을 점수로 환산하는 시대는 지나간 트렌드가 될 것이다.
스펙의 미래에 스펙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