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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윤하 Jan 14. 2021

미래는 파도처럼 발을 적신다

2034세대 400명을 만나다

2013년, 나는 1년 동안 400여 명의 사람들을 만났다.


이전에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이며, 아마도 미래 워크숍이 아니었으면 만날 일이 없었을 사람들. 서른 살까지 나름대로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그들 대부분은 나의 의지에 따라 관계를 만들어 온 사람들이었다. 미래 워크숍에서 만난 사람들은 달랐다. 나의 생각, 취향, 선호도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나이, 직업, 학교, 학과, 사는 지역 등을 고려하여 다양하게 구성된 사람들이 '미래를 토론한다는 것' 하나로 20명씩 그룹 지어 모여들었다.  


참가자 리스트를 만들었기 때문에 기본 정보는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생생한 모습은 본격적인 미래 토론의 시작과 함께 살아났다.


워크숍은 총 3시간으로 진행되었다. 참가자가 제일 먼저 하는 것은 제비뽑기다. 제비 4가지 색이 는데 이 색에 따라 팀이 나누어지며, 동시에 각기 다른 미래 사회의 시민이 된다. 참가자들은  팀별로 부여된 미래 사회 시나리오를 읽고 토론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추측하듯 토론하지 않아야 한다는 이다. 미래 워크숍이 시작되면 각 참가자는 시나리오의 시점인 20년 후의 미래인으로 스스로를 인식해야 한다. 시나리오에 제시된 상황은 이미 현실화된 것이고, 그 미래에 사는 시민으로서 현재성을 가지고 의견을 주고받는다.


예를 들어 주황 미래를 뽑은 사람들은 계속 성장 미래(continue growth)의 시민이 되는데 이 미래는 경제적인 풍요와 동시에 심화된 양극화를 보여주는 미래로서 해당 미래 조건에 따라 토론 해야 한다. 누구나 나름대로 바라는(예측하는) 미래상이 있지만 이 토론에서 개인의 주관적 미래상은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국적이 정해지는 개념과 비슷하다.


한편 노랑 미래를 뽑은 사람들은 붕괴 미래(collapse) 시민이 되는데 이 미래는 자연재해, 자원고갈 등의 원인으로 붕괴하여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하는 사회다. AI 비서 화성 식민지를 상상하던 사람들도 이 미래에서는 고갈된 자원과 줄어든 인구, 생존이 최우선인 미래 사회 조건에 집중해야 한다. 나머지 두 미래는 보존 미래(discipline), 변형 미래(transform)로 붕괴 직전 현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절제하는 미래와 극도로 발달한 과학기술 속에서 인간 외의 존재와도 공존하는 미래다.


이 매력적인 4가지 분류는 절대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인식을 확장시킬 수 있는 배타적 조건의 전형적 예시에 가깝다. 연구를 준비하며 4가지 미래에 푹 빠진 나와 처음 접하지만 미래 시나리오를 통해 빠르게 적응해가는 참가자. 처음에는 미래 시민이 되는 것이 어색한 듯 보였던 사람들도 얼마쯤 시간이 지나면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곤 했다. 이 미래의 매력, 문제점, 대안을 만드는 데 열정적으로 몰입했다.


이 경험을 통해 내가 느낀 것은, 누구나 미래를 궁금해하며, 누구나 미래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한다는 점이었다. 다만 살아가며 미래에 대해 말한다는 것, 아니 진지하게 토론할 수 있는 기회가 너무 적기 때문에 그걸 모르고 있었을 뿐.


미래 워크숍을 경험하며 어느새 미래연구를 단순한 일의 의미 이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자면, 나는 곧 미래연구와 사랑에 빠졌다. '미래'라는 필터를 통해 표현되는 사람들의 생각, 진심, 그리고 정답이 없기 때문에 섣불리 의견을 내세우기보다는 일단 경청하려는 태도, 조금씩 조율되는 각자의 미래 이미지, 혹은 미래에 대한 바람. 무엇보다 미래란 결코 혼자 만들어 갈 수 없다는 깨달음.


한 발짝 떨어져 행사를 준비하던 나 어느덧 한 명의 시민이 된 듯 워크숍에 몰입다. 때로는 성장 미래, 때로는 붕괴 미래, 때로는 보존과 변형 미래 시민으로. 의견을 내는 대신 수평적으로 토론할 수 있게 돕는 역할을 맡았지만, 워크숍이 끝나갈 쯤에는 4가지 미래상을 통해 서로 다른 가능성을 탐색 재미에 푹 빠져버렸다.


다양한 미래를 상상하는 것을 즐기기 시작하면서 인간 관계도 변화해갔다. 어느새 나는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는 데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나의 좋고 싫음과 상관 없이 만남이 이어졌다.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변화가 싫지 않았다. 마치 바닷가에 맨발로 서 있는 것처럼, 만남의 물결은 끊임 없이 발을 적시고 물러나길 반복했다.  

그렇게 나의 첫 번째 '미래 이미지'는
결코 멈추지 않는 파도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이 연구 결과에 대해 말하자면 2034세대가 가장 살고 싶어하는 미래는 '붕괴' 미래였다. 다소 충격적인 결과를 두고 연구원 내에서도 여러 의견이 있었다. 청년 세대는 정말 붕괴를 원하는가?


이 질문은 2014년, 2015년 연구로 이어졌다.

이후 나는 전국 5대 광역시를 돌며 2034세대를 만났고, 다음 해에는 4050세대를 만났다.


이렇게 나의 미래연구 여정은 공간의 경계, 세대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어졌다.


살아 움직이는 연구.


어느새 '연구'라는 행위가 주는 편견이 깨져가고 있었다. 미래연구는 결코 정적이지 않았다.


나는 그 어느때보다 많은 거리를 이동했고, 새로운 길을 걸었고, 낯선 이들을 만났다. 무엇보다 미래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를 들었다.  


파도는 끊임 없이 다가와 발을 적셨다.

그럴수록 난 이 예측불가한 바닷가를 더 걸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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