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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rizo May 28. 2021

모로코 발 서울여행

지향 언니에 관한 일기


1.

 내가 오늘 수영장에 간 건 어제 지향 언니를 해방촌에서 만났기 때문이고, 2차로 간 카페에서 안주 없이 로제 와인 한 병을 나눠 마시느라 2년 전 모로코 여행 이야기를 너무 오래 한 탓이고, 언니가 헤어지고 난 후 내게 보낸 사진 한 장을 너무 유심히 본 탓이다.

사진 속 나와 언니는 당시 모로코 여행 중이었다. 우리는 유럽 여행 동행 커뮤니티에서 알게 된 사이인데, 각자 포르투갈, 스페인에서 여행을 하다가 모로코에서 만나 사막 여행을 함께 하기로 계획했었다. 모로코를 함께 여행하며 우리는 이슬람 국가인 이 여행지에서 술을 쉽게 구할 수 없음을 늘 아쉬워했다. 그러다가 1층에 수영장이 달린, 조식이 허름하게 제공되고 작은 수영장이 있는 우리의 마지막 숙소에서 드디어 감자칩을 안주 삼아 산미구엘을 마실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감자칩을, 지향 언니는 산미구엘을 손에 든 채 수영복 차림으로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이 사진이 완성된 것이다. 아 이때 우리 수영장에 있었네요, 하며 나는 그 시간을 회상하다가 그 마음이 다음날 아침까지 이어져 집 근처 수영장을 찾았다.  



2.

 버스를 타고 성신여대역 정거장에서 내려 골목길 사이를 지나 주민센터에서 운영하는 것 같은 허름한 운동센터에 들어섰다. 입구에서 일일 사용권을 결제한 뒤 가장 무난하게 생긴 검은색 수모를 구매했다. 수경은 본가에 있기도 하고 왠지 이것까지 사면서 하루 수영을 하기엔 빚지는 기분이었고, 수모는 없으면 수영장을 이용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사야 했다. 일일 입장권은 8천 원인데 그나마 살만한 디자인의 수모는 1만 원이었다.

계산을 하고 들어간 샤워실에는 다 할머니들뿐이었다. 다 벗고, 서늘하고, 물의 마찰 소리가 합성수지 천막 너머로 들리던 그 샤워실에서 낯설고 늙은 시선이 내 등을 훑는 모습을 보는 기분이 위협적이라기보다는, 외부인을 보는 시선에서 경계심이 느껴져 나도 덩달아 날을 세웠다.


 쉬는 시간이 끝나는 시간은 정각이었고 나는 49분쯤 키를 받았으므로 정각까지 남은 시간 동안 계속 샤워기 버튼을 누르면서 수영복을 입은 몸에 따뜻한 물을 쬐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5월 말인데 전혀 여름 같지 않은, 소나기가 계속되어 서늘한 날의 연속이었다.

 정각 시간이 거의 다 되어 수영장 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풀장의 오른쪽 끝에 지도 강사같이 보이는 검은 쿨 티를 입은 남자가 의자에 앉아 물속에 들어가 있는 남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잠시 수영장 안을 훑고 일부러 대화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가로질러 갔다. 수심이 1.25M인 것에 안도하며 나는 오른쪽에서 두 번째 레일에 걸 터 앉았다. 수영장 락스 물 냄새가 많이 났다. 하지만 그 냄새에 익숙해지는 것만으로 기분이 조금씩 나아졌다. 수영장 풍경이 익숙해지자 나의 수영 강사 노릇을 했던 친구들이 생각났다. 교환학생 가기 전 한강 수영장에서 함께 살을 태우던 희주, 같은 날 수영장에서 만나 내게 발길질을 알려줬던 어떤 외국인 아저씨, 이틀 동안 함께 놀았지만 내가 리뷰를 안 썼다고 오해하고 날 쌩깐 카우치 서핑 호스트 가엘-그때 쌩까지 않았던 인연들 중 아직까지 연락을 하는 인연도 딱히 없다-, 그리고 사하라 사막에서 만나 한 숙소를 쓴 지향 언니와 나정 언니.


 그 덥고 다정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나는 눈을 감은 채로 물속에서 발길질을 시작했다. 하지만 위에 나열한 사람들과의 수영은 모두 물놀이였고, 그런 단편적인 물놀이에서 배운 수영으로는 자유형도 제대로 못 한다. 수영을 한다기보다는 물속에서 발장구를 친다는 말이 어울린다. 수경도 안 쓴 채 직선으로 나아가지도 못하는 젊은 여자를 보고 있던, 같은 레일을 쓰던 할머니가 나에게 주의를 줬다.


-오른쪽 일 직선으로 길을 써야 돼요.


나는 아 네, 그럴게요. 하고 대답했지만 수경이 없었으므로 수영을 하면서 제대로 앞 길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할머니는 내가 수경이 없는 사실을 나중에 발견하고는 수경이 없으면 수영을 할 수가 없어서 나가서 사 오든, 구해와야 한다고 이야기해 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수영 강사가 나에게 노란 수경을 빌려줬다.


수경이 있어도 난 여전히 발을 참방 대고, 코에 락스 물이 들어가는 느낌이 무서워서 허우적대다가 중간에 멈춰버리는, 휴양지 수영복을 입은 일일 수강생이었다. 이런 내가 레일 끝에 가만히 서있자 할머니는 내게 와 나의 일일 수영 강사 역을 자처했다. 그녀는 나의 발 구름을 지적하며 직접 손으로 시범을 보이며 올바른 발 구르는 법을 보여줬다.


-지금 언니는 물속에서 발을 구르는데, 발을 이렇게 차지 말고 이렇게 차야 해. 무릎을 구부리지 말고, 쫙! 편 채로. 물을 뻥 뻥 차야 해. 그래야 멀리 나가. 수영은 발차기가 90%야. 발차기 연습만 하면 손은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나가. 지금 여기 앉아서, 다른 사람들 어떻게 수영하는지 봐봐. 내가 직접 하는 것보다, 잘하는 사람들 구경하는 게 더 많이 배울 수 있어. 물론 여기 사람들도 다 잘 못해. 나도 말이 쉽지, 막상 하면 무릎이 많이 굽어.


그녀가 나에게 자세 교정부터 배움의 태도까지 전수해 주는 사이, 이 생경한 대화에 관심을 새로 갖게 된 다른 할머니들이 우리 곁으로 모여들어 이 상황을 궁금해했다.


-아니 이 언니가 오늘 처음 온 것 같은데 발을 잘 못 차잖아. 나 원래 수강생들한테 말 안 걸고 수영만 하잖아? 이런 거 말해줘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어. 근데 언니는 젊으니까 금방 배울 것 같아서, 말해주는 거예요.


 네, 느낌을 알 것 같기는 한데, 이렇게 하니까 다리가 너무 아픈데요, 할머니의 관심에 마음이 풀어진 나는 어른들을 대하던 습관이 나왔는지 할머니에게 어리광을 피우며 괜히 더 미간을 찡그리며 웃었다. 지금 이 대화가 금방 끊이지 않기를 바랐다. 물 안에 들어와 느끼는 소속감을 더 오래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 동네에 살며 곧 다섯 번째 월세를 내게 되지만, 동네 사람들과는 단 한 번도 이렇게 길게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 내가 지금 다니는 길음역에 있는 대형 요가 학원은 수강생이 많아 수업 시간엔 거의 핸즈온이 없고, 선생님과 사적인 대화를 할 틈도 없이 수업이 끝나면 모두 썰물처럼 교실을 나간다. 예전에 다니던 본가 근처의 수련원은 정서적 지도자와 수강생의 정서적 교감이 있었다. 지금 내가 사는 이 동네에서 그런 느낌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고, 난 늘 소비자였다. 휴게음식점에서도, 마트에서도, 그리고 요가원에서도 의견을 주고받는 대화를 해본 적이 있었냐고 물으면 대답을 할 수 없다.

 그런 내가 오늘 수영장에서 할머니들 사이에서 느낀 기분은 또 언제 느꼈었냐면, 교환학생으로 파리에 있던 시절이었다. 너무 외로워서 어디든 급하게 기댈 곳을 찾아다니다가 한인 교회에 처음 갔을 때. 노래를 부를 줄 모르지만 성가대원이 되고 싶다고 했을 때 다들 한 학기 지내다 떠날 이 여자애를 익숙하게 대해줄 때 느꼈던 환대와 소속감을 다시 서울에서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옆 레일에 계속 서 있던 남자는 나보고 발차기 연습을 할 거면 교실의 왼 편에 있는 판자를 가지고 와서 앞으로 나아가는 연습을 하라고 일러줬다. 그렇게 의도치 않게 난 열심히 발차기 연습을 했고, 50분이 되어 할머니들과 함께 수영장에서 나와 다시 할머니들 틈에서 샤워기로 뜨거운 물을 쑀다. 아까 내게 수영을 가르쳐주셨던 할머니를 힐끔 쳐다봤다. 어깨가 넓고 다리가 곧고 늘씬했다. 또 수모 아래로 적갈색 머리카락이 나와있었다.

 정각이 되어 난 다시 자유 연습 전용 레일로 돌아가고 할머니들은 정규반 수업 전용 레일에서 강사의 지도를 받으며 수업을 들었다. 나는 혼자 발차기를 연습해보려고 했으나, 다리에 힘을 이미 너무 많이 써 20분도 채 더 연습하지 못한 채 물 밑에서 숨 참기를 하거나 레일에 90도 돌아간 채 물속에 앉아 숨을 참는 남자를 구경하다가 내게 수경을 빌려줬던 강사에게 수경을 다시 돌려주고 뜨거운 맹 물에 몸을 씻고 지친 채로 수영센터를 나왔다.


3.

 수영장을 나와 아까 왔던 길로 돌아가면서, 분위기가 좋다고 생각했던 카페에 들어갔다. 머리가 젖어있는 모습이 조금 민망했다. 그 카페는 옆에 있는 바버 숍과 같은 인테리어의 카페였는데, 밝은 회색의 콘크리트와 석재 가구가 주는 무덤덤한 인상과 반대되게 밝은 오커 색의 목재와 검정 철재가 섞인 가구, 동그랗거나 아주 평평한 모양의 펜던트 조명의 인테리어, 그리고 직원이 쓰고 있던 분홍색 피그먼트의 캠핑 캡 모자와 영화 백 투 더 퓨쳐가 그려진 록 티셔츠에서 느껴지는 발랄함을 보며 모로코 여행 직전 머물렀던 리스본의 호스텔을 떠올려 이 마저도 여행 온 기분이 들었다.

 운동을 하고 나와 피곤한 나는 처음에는 필터 커피를 마실까 했지만 더 진한 음료를 마시고 싶어 마키야토를 주문했다. 그제야 직원은 펑키한 배경음악을 틀었고 나는 터덜터덜 창가의 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자리를 잡고 어제 언니에게서 받은 언니의 단편 소설 모음집을 꺼내 가장 눈에 띄는 소설을 하나 읽었다. 이번 소설은 자기보다 8살 젊은 외국인 남자를 만나는 20대 후반의 한 직장인 여자의 불만족스러운 삶과 연애 관계에 관한 이야기였다.


4.

 어제부터 언니의 글을 네 편째 읽고 있다. 이제 언니의 글에 화자가 어떤 성격인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난 언니와 해방촌에 있는 모로칸 식당에서 양고기 타진과 새우 오버 라이스를 먹고, 에스프레소와 모로칸 민트 티를 마시고 나왔다. 그리고 언니가 동업한다던 다른 언니가 해방촌에서 운영하는 책방에 가서 언니의 에세이를 읽었다. 그 책방에서 나와 아주 가까이에 있는 내가 한번 가봤던 독립 서적 책방도 들렀다. 대부분 디자인에 관한 책들이라, 이미 여행 기분을 느낀 나는 언니에게 기념품이라도 줄 요량으로 이리저리 책을 찾아봤지만 언니에게 주고 싶은 마땅한 책을 못 찾았다. 언닌 글 쓰는 사람이라 내게 책을 준 거고, 나는 그림을 그릴 줄 아니까 오늘 놀았던 걸 그려서 언니에게 엽서로 보내줄까. 말랑한 생각을 했다. 그리고 결국 빈손으로 두 번째 책방에서 나와 언니가 데려간 카페에서 로제 와인을 나눠마시며, 언니의 가장 최근에 발행된 단편 소설을 언니 노트북으로 읽다가 울었다. 연초를 피우던 언니는 훌쩍이는 날 보고 성주 씨, 추워요?라고 물어봤지만 난 글 속의 화자에게 공감하다가 울음이 났다. 그나저나 언니, 원래 전자담배만 피우다가 지금은 연초도 피네요, 물으려다가 언니가 다른 테이블의 담배 피우는 남자들을 보고는 해방촌은 참 위생수칙도 안 지켜,라고 먼저 이야기하길래 말을 삼키고 글을 마저 읽었다.


 언니는 화자에서 언니가 보이는 글을 쓴다. 내가 읽은 그녀의 글의 주인공은 모두 상처가 있고,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반추해보면 이런 이유였겠네,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이미 지나버린 일에 후회를 할 수도 없고, 그냥 그렇게 감정을 닫지 못한 채로 자기 앞의 삶을 산다. 언니의 소설은 짧은 대신 글 하나에 한 감정만 지배적이다. 사실 언니의 글은 모두 큰 하나의 감정으로 묶여있는 듯하다. 그래서 언니를 만나고, 언니의 글을 읽은 난 어제와 오늘 내내 외로웠다. 그냥 나도 언니 글의 화자에 계속 공감해서, 같이 힘들고 싶었다. 집에 와서도 책상 밑에서 책을 읽다가 친구와 전화를 했다. 어제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어제 모로코 여행을 같이 갔던 언니를 만났어, 만나서 그 언니가 쓴 책을 읽고 그때 사진을 보다가 오늘 수영장에 갔어, 근데 그 언니 글의 사람들은 모두 다 외로워하는 것 같아. 나도 같이 외로워지더라.

 이 말을 끝내고 나니 왜 내가 외로워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왜 어제부터, 이렇게까지 이 소설 속의 사람들에게 공감한 거야? 또 난 왜 갑자기 수영장에 다녀온 거야? 다시 마음이 무덤덤해지니까 그런 감정을 느꼈던 내 상태가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비록 우리는 반나절을 함께 했지만 언니를 만나고 나서 난 안 하던 일을 했고 나의 이틀이 사라져 있었다. 몰랐는데 지향 언니는 위험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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